時事論壇/時流談論

<時評>불편한 진실 직시해야 克日 가능하다

바람아님 2017. 3. 7. 23:24
문화일보 2017.03.07 11:50

선조 24년이던 1591년, 왜(倭)에서 돌아온 통신사 두 사람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당파가 달랐다. 한 사람이 전쟁을 경고하자 또 한 사람은 그런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미 서구식 도시로 탈바꿈한 교토의 화려함을 보고도 전조후시 좌묘우사(前朝後市 左廟右社)라는 중국의 도성 설계 방식도 모르는데 전쟁을 할 능력이 없을 거라 했다. 전쟁의 와중에 이순신은 투옥되고, 그가 없는 동안 우리 조상들의 귀와 코가 잘려 일본으로 보내진다. 구한말 개국과 쇄국을 둘러싼 정쟁은 망국을 초래했고, 1946년 3·1절엔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 세력이 따로 기념행사를 열다가 충돌하더니 기어이 분단을 초래했다….

지난주 3·1절 만세의 함성 역시 탄핵 찬성과 반대의 대규모 집회 속에 묻혀 버려 조상들 뵐 면목이 없게 됐다. 총성과 포성이 난무하는 곳만이 전쟁터는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외세의 위협 앞에 놓여 있긴 마찬가지다.


일본은 우리가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면 두 가지 카드를 꺼낸다. 우선,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강제관할권 규정을 수락하지 않은 우리 동의 없이 일본의 뜻대로 될 가능성은 작지만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역대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 가운데는 일본인이 3명이나 있다. 그중 한 사람은 현직이다. 중국도 5명의 재판관을 배출했다. 탄핵 재판 덕택에 법관의 모습을 자주 봤지만, 국제사법재판소에 한국인 재판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는, 통화 스와프 협상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전, 일본은 우리 정부의 긴급 자금 요청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규모 자금을 회수해 갔고, 우리는 결국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았다. 2001년, 처음으로 일본과 13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 협정이 체결됐고, 2011년엔 700억 달러 규모까지 확대됐다가 2015년 모두 해지됐다. 지난해 위안부 문제 합의 후 우리 측 요청으로 다시 협상이 시작됐지만, 이번에 또 중단됐다. 중국, 호주와의 통화 스와프가 있긴 하지만 일본과 통화 스와프 협상을 해야만 하는 현실을 곱씹어 봐야 한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알아야 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국제무대에서 우리 위상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일본과의 국력 격차가 작지 않다. 단적으로 유엔 예산에 대한 기여도만 봐도 우리가 10위권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일본은 미국에 이어 부동(不動)의 2위를 내놓지 않는다. 미국의 주한대사와 주일대사의 정치적 비중도 큰 차이가 난다. 캐슬린 스티븐스, 성 김, 마크 리퍼트 대사들은 우리의 사랑을 받았지만 대부분 국장급이었다. 이에 비해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을 비롯해 최근의 캐럴라인 케네디 대사에 이르기까지 전직 하원 의장과 상원 원내총무 등 거물급 인사가 주일대사로 부임했던 사실과 너무 대비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는 2002년 9월 북한을 방문해 납북자 5명의 귀국을 성사시켰고, 2년 뒤 이들의 북한 가족까지 일본으로 데려왔다. 우리 정부도 각고의 노력 끝에 납북자들을 가족과 상봉토록 하는 데 성공 했지만, 짧은 상봉을 뒤로한 채 모든 것을 운명이라 생각하며 북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의 뒷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다. 그런 우리 모습을 보며 일본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유재란 때 희생된 우리 조상들의 귀와 코가 묻힌 곳은 아예 교토의 관광 코스가 돼 버렸다. 이게 나라냐.


일본 해군의 이지스함 6척엔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만 휘날리는 게 아니다. 곤고(金剛)함부터 아시가라(足柄)함까지 모두 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하던 옛 군함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역사와 전통의 명맥을 잇겠다는 건데, 침략의 과거사는 다시 이어지지 않길 바란다. 과거사 문제가 국가 대 국가의 법적 문제를 넘어 인류 보편적인 도의적·인권적 문제로 인식되도록 일본 젊은이들과 꾸준히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비록 정부수립 이전의 일이지만, 교토의 비총(鼻塚)도 완전히 옮겨와야 한다. 또, 우리가 일본을 ‘만만하게’ 볼 수 있게 해줬던 조선·자동차·전자 등 우리 기업들이 일본과의 경쟁에서 선전할 수 있도록 응원해야 한다. 소모적인 정쟁에 함몰된 채 외세에 밀려온 과거사의 고리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끊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