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 A U.S. View >한국이 '운전대' 잡기 위한 조건

바람아님 2017. 9. 21. 09:49
문화일보 2017.09.20. 14:10
2005년 9·19 공동성명 채택 뒤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자축하는 6자회담 수석대표들. 자료사진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David Straub

북핵 해결을 위한 획기적 이정표라던 9·19 공동성명이 나온 지 꼭 12년 지났다. 2005년 당시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6자회담’ 끝에 북한 핵 폐기와 한반도 평화협정까지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규정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북한 비핵화의 커다란 진전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합의문은 실현 가능성 없는 ‘희망사항’의 나열에 불과했다. 필자는 9·19 공동성명이 나오기 1년 전에 국무부 한국과를 떠나기는 했지만, 당시 동료들에게 9·19 합의는 깨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과 1년 뒤인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1차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안타깝게도 필자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당시 북핵 수준과 의지 등을 놓고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했음에도 북한과의 합의를 회의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북한의 속임수를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 업무를 맡았다. 지금은 잊혔지만, 4자회담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한국과 미국의 결단에서 시작됐다. 북한이 회담에 나오기를 극도로 꺼렸음에도 결국 미국은 설득에 성공했다. 그러나 북한은 2년간 이어진 회담에서 평화협정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계속 거부했다. 평화협정은 미국과 북한 간에만 서명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최근 회고록에도 썼지만, 북한 대표단은 남한 대표단과 눈을 맞추는 것조차 거부했다.


필자는 2003년과 2004년에도 미·중·북 3자회담에 참여해 북한 대표단과 협상했고, 이후 6자회담에도 세 차례 참석했다. 2003년 4월 베이징에서 열린 3자회담에서 북한의 리근 대표단장은 미 대표단장인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에게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미국이 북한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핵무기를 더 만드는 것은 물론 다른 나라에도 확산하겠다고 말했다.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북한이 명확하게 미국 측에 핵무기 보유 사실을 인정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4개월이 지난 뒤, 6자회담 세 번째 회의가 끝날 무렵에 북한 대표였던 김계관은 켈리 차관보에게 핵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켈리 차관보가 김계관의 말을 끊으며 “리근이 핵무기를 가졌다고 이미 말했다”고 하자 김계관은 신경질적인 헛웃음과 함께 “그건 전술적으로 해본 말”이라고 대꾸했다.


9·19 공동성명은 부시 행정부 2기의 새로운 전략에서 탄생한 것인데, 두 가지 잘못된 인식을 기초로 했다. 첫째는 북한이 몇 가지 인센티브를 주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해 나가는 합의를 이행할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둘째, 북한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다른 6자회담 참가국,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에 압력을 넣을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이었다. 4자회담, 그리고 김계관의 ‘전술적 거짓말’에서 나타나듯이 북한은 외교의 일반적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한다”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관계의 규범을 인정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북한은 9·19 공동성명 채택 뒤 1년여 만에 첫 핵 실험을 강행했다. 애당초 북한이 합의를 준수하려는 생각을 하기나 했을까.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에 압력을 행사할 생각이 전혀 없다. 중·러는 언제나 북한 핵 문제가 기본적으로 미·북 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지금도 북한 핵과 미사일보다 한국의 사드 배치에 더 큰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이런 과거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중·러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한국 내에서도 무조건 6자회담을 재개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6자회담을 재개하려 한다면 북한은 조건을 내걸 것이다. 예를 들어, 핵무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공식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라, 그리고 제재를 중단하라는 것 등이다. 북한은 6자회담이 열리면 분명히 한·미 관계를 이간질해 동맹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끝장내게 만드는 기회로 활용할 것이다. 북한이 그런 조건으로 6자회담에 돌아오게 된다면, 결국 북한이 점점 더 위험한 도발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북한이 신뢰할 만하고, 그걸 믿을 만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협상을 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은 옳다. 문재인 대통령이 진정으로 북한 문제 해결에 ‘운전대’를 잡고 싶다면, 북의 도발에 트럼프 행정부보다 더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해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를 어떻게 이행하는지 점검하고, 느슨한 나라에는 이행을 촉구해야 한다. 중국을 향해 사드 보복은 터무니없고 위법적 행위라는 입장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문 대통령의 내일 유엔총회 연설에 이런 내용이 포함되길 기대한다. 그래야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도 북한의 핵 개발을 중단시키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실효성 있는 공동 노력에 대한 공감대도 이룰 수 있다. 더 이상 협상을 위한 협상은 없어야 한다. 9·19 때처럼 실패할 협상을 되풀이하면, 이번에는 한반도가 정말 심각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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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76년 미 국무부에 들어가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참사관, 한국과장 등을 역임한 뒤 2006년 퇴직, 한·미 관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저술했으며 현재 세종연구소 세종-LS 객원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