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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시인 박준의 酒방] 도가니찜 마지막 국물을 떴다… 뜨거웠다

바람아님 2018. 1. 8. 09:15

(조선일보 2018.01.06 시인 박준)


[시인 박준의 酒방] 쇠냄비 밑에 활성탄
이 집의 40년 전통이다 냄비 바닥을 휘젓다번뜩 떠오르는 해탈
"세상에 쓸모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네"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단 두 권으로 예외적 인기를 얻고 있는 젊은 시인

박준(35)이 소주 한 잔 즐길 수 있는 노포(老鋪) 탐방을 시작한다.


문학잡지를 발간하는 작은 출판사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나는 자주 충무로에 있었다. 모세혈관같이 구석구석 뻗어 있는 충무로의

작은 골목들에는 인쇄소며 제본소가 줄지어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한 것은

인쇄되어 나오는 잉크 채도가 적절한지 혹은 책의 32쪽 다음에 33쪽이 바르게

제본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를 번갈아 맡으며

종일 뛰어다니면서도 나는, 스스로가 무용하게만 여겨졌다.

그것은 매번 작업 과정에서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쇄되어

나오는 색은 처음 설정된 색과 같았고 32쪽 다음에는 33쪽이, 그리고 장을

넘기면 34쪽이 사이좋게 놓였다. 책 제작 과정에서 사고가 생기지 않는 것은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쓸모를 발견할 수 없는 일과가

더없이 지루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유용한 존재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바로 일을 마치고

저녁밥을 핑계 삼아 반주로 술을 마시는 순간이었다.


함께 일하던 직장 선배는 충무로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주었다. 유난히 노포가 많았고 또 어느 집은

간판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무엇을 파는지 알 수 있는 식당도 있었다. 술잔이 한 순배 돌듯, 충무로

인근 식당을 한 번씩 모두 가보았을 무렵, 나는 머릿속으로 가장 좋았던 식당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새로 떠오르고 또 제외되는 식당 가운데에서도 늘 내가 첫째로 꼽는 집이 있었다.


황소집. 도가니탕, 도가니찜<사진>, 생등심. 단 세 메뉴만 파는 집.

메뉴는 세 가지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가니찜을 먹는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찜'과 달리 황소집의

도가니찜은 국물과 함께 나온다. 탕보다는 조금 적고 전골보다는 한참 많은 진한 사골 국물. 먼저 대파와 간 마늘이 흐드러진

이 국물을 몇 번 떠먹게 된다. 그다음에는 도가니와 '스지'를 건져 소스에 찍어 먹는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자작하게 남아 있는 국물에 소면을 말아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절차다.


40년이 넘게 이어진 황소집 도가니찜의 전통은, 활성탄을 피우고 그 위에 두꺼운 쇠 냄비를

올려 끓여가며 먹는다는 것이다. 직화 구이나 훈제도 아닌데 활성탄을 쓴다는 것.

언뜻 무용한 일이라 여길 수도 있다. 나 역시 처음 그 광경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냄비 바닥을 휘저어 뜬 마지막 국물 한 숟가락을 넘기며, 어쩌면 지금 당장은

무용해 보일 수 있어도 끝까지 무용한 것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혹은 마지막으로 떠먹은 국물 한 숟가락이 여전히 뜨거웠던 것처럼.


황소집(전화 02-2273-0969), 일요일 휴무,  도가니탕(1만원),

도가니찜(1인 1만8000원), 생등심 구이(3만2000원), 면사리(2000원)



한숨 쉬는 대신 노래를 불러라


(조선일보 2018.01.06 어수웅 기자)


[魚友 야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평생 신문 배달로 식구를 먹여 살린 분이 있습니다. 55년생입니다.

해 바뀌었으니 신문 나이로 올해 63세. 이분의 세계관은 '한숨을 쉬는 대신 노래를 불러라'입니다.

사는 데 짜증이 나거나 지치면 한숨 쉬는 대신 노래를 불렀다는 거죠.

노래 부르는 동안은 기분을 달랠 수 있고 좋은 생각이 났답니다.

소년 시절 자신을 버리고 집 나간 어머니, 집안 식구 부양하는 데는 젬병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면서도요. 전에 영국과 일본 대사를 지낸 라종일(78) 가천대 교수에게 이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냉소적인 청년 세대가 들으면 '정신 승리'한다고 할지 모르죠. 하지만 신문 배달 노래꾼은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정권 잡은 분들이 말하는 소위 '시대정신'이라는 표현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요.

한때는 자본가와 지주를 모두 없애버리고 누구나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시대정신이었다가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었고, 어제까지 온갖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던 분이 하루아침에 천하의 몹쓸 사람이 되기도 하더라는 거죠. 공산주의·

사회주의·파시즘·자유주의·신자유주의 등 이 거창한 시대정신들은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몰려갔다가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변덕스러운 바람에 불과한 것인가. 당신은 누구 편이냐고 목청 높이는 사람들이 스스로는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너무 큰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부터 옆 방으로 책상을 옮겨 지면을 만듭니다.

이제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의 이야기입니다.

선배들이 다진 주말섹션 Why의 장점은 계승하되, 더 생생하고 산뜻한 신문을 만들어 보렵니다.

새 연재로 20년간 전국을 돌며 구멍가게를 그려온 펜화 작가 이미경씨의 '구멍가게 오후 3시'와 소주 한잔 먹을 수 있는

노포(老鋪) 탐방 '시인 박준의 酒방'을 우선 시작합니다. 이 소박한 편지의 제목은 '魚友야담'. 친구들과 더불어,

한숨 쉬는 대신 노래 부를 수 있는 뉴스를 담겠다는 포부입니다. 우리 부서 막내 기자 한 명이 '주말을 행복하게,

뉴스는 완벽하게'라고 구호를 외치더군요. 목적어와 동사를 바꿔봅니다. 주말은 완벽하게, 뉴스는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