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3.25 02:00
이는 1987년 개봉해 엄청난 흥행과 이슈몰이를 한 영화 ‘로보캅’의 이야깁니다. ‘토탈리콜’, ‘원초적 본능’, ‘스타십 트루퍼스’ 등 1980~9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폴 버호벤 감독이 연출했죠. 영화는 자본에 국가·사회가 예속되고, 타락한 기업이 시민들이 사적 영역까지 통제하며 막대한 부를 이뤄가는 디스토피아의 미래 모습을 다룹니다.
그 중심에 ‘OCP(Omni Consumer Products)’라는 거대기업이 있죠. 처음 경찰 권력을 인수한 OCP는 나중에 도시의 소유권을 갖더니 마지막엔 다른 자본에 도시를 팔아먹기도 하죠. ‘omni(전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OCP는 시민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과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도시 전역과 시민의 일상 곳곳에 그들의 손이 뻗쳐 있는 거죠. 기업이 일터인 동시에 소비처이고, 정부인 동시에 삶의 모든 것을 관할하는 ‘완전체’입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시면 재생됩니다. [유튜브, 영화 로보캅]"
로보캅은 OCP가 지배하는 디트로이트에서 인간과 로봇이 결합된 경찰입니다. 나중에 OCP는 골치 아픈 경찰 노조(공권력이 민영화 됐기 때문에 노조가 존재함) 때문에 로보캅 대신 100% 로봇 경찰로 대체하려 합니다. 이처럼 거대 자본으로 시민들을 지배하는 OCP에 맞서 싸우는 게 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입니다.
기업이 사회를 지배하는 미래,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학계에서는 이와 비슷한 논의를 ‘초국적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이라는 모델로 설명해 왔습니다. 어느 한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나라에서 생산·판매 활동을 하는 세계적 기업들이죠. 이들에겐 국가 간 장벽도, 영토의 한계도 없습니다. 다국적기업과 비슷한 의미지만 초국적기업은 자본집단이 웬만한 국가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우려스런 상황을 꼬집는 뜻이 강합니다.
세계적 정치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는 그의 책 『제국(Empire)』에서 “제국주의와 식민 질서, 소비에트의 장벽이 무너진 지금 ‘제국’이라는 새로운 체제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경제·문화적 교환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전 세계적인 움직임이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제국’의 핵심 주체는 특정 국가가 아니라, 국경과 국적을 초월한 초국적기업과 이들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자본의 흐름이죠.
현존하는 기업 중 이런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들입니다. 이들은 국가보다 속속들이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죠. 기업이 소유한 개인정보의 양은 이미 정부의 데이터베이스를 뛰어넘었습니다. 이용자들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 소비습관은 어떻게 되는지 등 플랫폼 사용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업은 알 수 있죠. 이를 통해 그 사람의 성향과 사고방식, 행동패턴까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보는 국가 간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죠. 이렇게 모인 빅데이터는 전 세계인을 하나의 영향력 아래 묶어두는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5000만명이 넘는 페이스북 사용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건 기업의 빅데이터 정보가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당시 이 자료를 토대로 유권자의 성향을 분석한 정보가 도널드 트럼프 캠프에 전해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이 같은 일이 더욱 심화된다면 기업의 힘이 특정 정치인을 당선시키거나 떨어뜨리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요.
기업국가의 실현 가능성이 높은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지난 회에 살펴본 것처럼 거대독점 자본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거죠. 유통 공룡 아마존이 온·오프라인 시장 모두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예입니다. 레닌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자본은 독점으로 치닫고, 이는 다시 한 국가를 넘어 다른 국가를 침략하는 제국주의로 진화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거대 독점자본으로 성장한 기업은 또 다른 시장을 추구하기 위해 더 넓은 영역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다만 과거의 제국주의는 국가가 중심이 돼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형식이었죠. 하지만 미래 사회에선 제국을 만드는 주체가 국가가 아닌 기업입니다. 앞서 네그리가 ‘제국’의 핵심을 기업과 자본의 흐름으로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죠. 로보캅의 이야기처럼 오랫동안 정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공권력과 시민의 은밀한 사생활 곳곳에 침투해 영향력을 넓혀가는 것이죠.
그리고 이 같은 독점 모델은 오늘날 많은 기업이 추구하는 성장 전략입니다. 안병진 교수는 “최근의 기업혁신 모델은 시장에서 1등을 차지해 2등과 격차를 벌리는 게 아니라 완벽한 시장 지배를 목표로 한다”며 “독점적인 기업이 시장지배를 강화하면서 이들의 권력과 영향력은 상상할 수 없이 더욱 세질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단순히 세 회사가 직원 복지 차원에서만이 일을 시작했을까요? 기업의 궁극적 목표는 이윤 추구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도 결국엔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될 거라는 지적이죠. 이들의 사업 모델이 구체화 되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의료·보험·제약 시장에 문어발식 확장이 가능해 집니다. 아마존의 IT 연결망과 버크셔 헤서웨이와 JP모건의 막대한 자금력이 동원되면 또 다른 ‘타이탄’이 나올 수 있단 이야기죠.
물론 단순하게 기업이 성장하는 것을 우려하는 건 아닙니다. 자본과 시장의 메카니즘이 소수에 독점되고, 신생기업이 새롭게 시장에 진출하며 공존할 수 있는 생태계까지 파괴하는 게 문제입니다. 거대독점자본으로 성장한 기업은 영화 로보캅, 블레이드러너처럼 국가의 역할까지 대신하려 들 수 있다는 거죠. 영화처럼 기업이 공권력을 갖고, 도시와 나라 전체를 지배하는 세상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국가의 개념과 역할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공적 영역까지 움켜쥐려는 기업의 도전에 맞서 국가의 실질적 운영 주체인 정부는 어떤 대응을 하고 나설까요. 미래 국가의모습과 제도, 정부와 기업의 관계는 어떻게 펼쳐질지 다음 주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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