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4.09 김태근 경제부 차장)
김태근 경제부 차장
지금 경제 부처를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는 경제기획원(EPB) 출신들이 주류다.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두 명의 차관 모두 그렇다.
1980~90년대 EPB는 자금 지원, 세제 혜택 같은 대증(對症)요법보다 경제의 체질 개선과 구조 개혁 같은
긴 시각의 해법을 강조하며 재무부와 함께 경제정책을 이끄는 쌍두마차 역할을 했다.
모피아의 폐쇄적인 엘리트주의와 반대로 EPB는 자유로운 사고와 참신한 발상이 돋보였다.
이런 전통은 노무현 정부 당시 경제정책을 주도한 EPB 공무원들에게 이어졌다.
박봉흠·변양균·장병완·변재진·반장식·김대기 같은 관료들이 청와대와 경제 부처에서 이상(理想)을 현실에 구현한 것이다.
2007년 당시 기획예산처에선 장관과 간부가 마주앉아 맞담배를 피우며 자주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한 번은 차관보급 간부가 장관의 지시 사항을 중간에 끊고 "말도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장관은 "허~허~" 웃으며 기개와 논리를 일부 수용했다고 한다.
'비전 2030'이라는 국가 장기 전략 보고서가 나온 것은 EPB의 이런 토론 문화와 당시 정권 등용술의 합작품이었다.
지난주 '적폐(JP)지수 공포, 공무원 짓누른다'는 기사를 쓰면서 판이해진 EPB 공무원들의 요즘이 안쓰러웠다.
이 정부도 정부 부처마다 토론도 하고 회의도 많이 연다.
하지만 대다수 공무원은 지금 하는 일이 언제든 '적폐'로 몰릴 수 있다며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가 안 될 일, 지시가 있는 일만 나선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복지부동(伏地不動) 못지않게 미래 담론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한 국장급 공무원은 "요즘은 당장 오늘만 넘기자는 생각으로 산다"고 했고,
어떤 과장은 "일자리나 구조조정 대책 등에서 장기 개혁 과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신경 안 쓴다"고 했다.
향후 정권에서 어떤 식으로든 적폐 청산의 주범으로 몰릴 수 있으니 당장 곤란한 일만 피하는 단기(短期)주의가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 밖에선 요즘 국가마다 중장기 비전 경쟁이 뜨겁다. 기술 발전이 세계를 격동시키는 시기여서 더 그렇다.
중국은 2025년까지 세계 최고로 제조업을 만든다는 국가 목표를 세웠고, 미국과 일본은 파격적인 기업 지원책으로
경제 부활을 본격화하고 있다. 프랑스·영국도 마찬가지다.
이들 나라 정부에는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면 국제 경쟁에서 탈락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하다.
이런 판국에 현 정부는 그나마 국가 전략을 수립해본 경험 있는 공무원들에게 '적폐가 아니냐'며 눈을 부라리며
손가락질하고 있다. 공무원들이 과거가 두려워 몸을 사리고 미래 대비에 손 놓고 있는 것은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자 비극이다.
'時事論壇 > 時流談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럼] '내로남불'과 '억지사지' (0) | 2018.04.12 |
---|---|
"북한 3세대 지도부, 북핵 협상에서 다른 결과 낳을 수도" (0) | 2018.04.10 |
<뉴스와 시각>중국 측의 충격적 文정부 평가/중국의 '문 정부 평가' 충격적? 해당 교수 "그런 말 한 적 없어" (0) | 2018.04.07 |
[기자의 시각] 실패로 끝난 '평화협정'들 (0) | 2018.04.06 |
[양상훈 칼럼] 공동묘지 같다는 어느 黨 (0) | 2018.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