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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다섯 독재자의 여자 “치마폭으로 혼군(昏君)의 천하를 품다!”

바람아님 2018. 5. 17. 10:52

조선pub 2018-05-15 09:11


⊙ “노동자를 이렇게 대우하면 안 된다” 스탈린 꾸짖은 대담한 ‘조롱 속의 새’
⊙ 무솔리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일요일 아침 기관지를 파는 사회당원에 그쳤을 것”
⊙ 히틀러 마음 뺏고자 권총·약물로 자살 기도… 베를린 폭격에도 의연했던 ‘23세 연하’
⊙ 덩샤오핑 축출 위해 1만 군사 일으킨 여장부(女丈夫)의 최후는?
⊙ 이라크 반군에 자금 지원 혐의… 행방불명된 후세인의 정실(正室) 
 
최근 올림픽과 공연으로 남북 간 교류가 깊어진 가운데 주목받는 북한 인사가 있다. 바로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이다. 현 단장은 올해 초부터 남북의 문화적 교류 과정에서 교두보 역할을 했다. 그는 1977년 평양에서 출생, 2005년경 악단 가수 시절 노래 ‘준마처녀’를 열창해 김정일의 눈에 들었다. 북한 소식통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김정일이 현송월과 관계를 맺어 왔다고 증언한다. 한때 김정은과 연상연하 내연설이 불거지기도 했던 현 단장은 김정일의 생전 ‘마지막 애인’이었다고 알려졌다.
 
  북한 김정일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역사 속 독재자들은 권력남용만큼 여성 편력이 심했다. 곁에는 서로 다른 매력의 여인들이 존재했다. 독재자들은 이들을 아내·정부·애첩·동지로 삼았다.
 
  폭정을 일삼던 혼군의 애인들은 정녕 서글픈 노리개였을까. 혹은 정변의 회오리에 파멸해 간 비극의 여주인공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거친 짐승을 조련하듯, 독재자를 치마폭으로 감싸고 호가호위한 야심가였을까. 거병과 전쟁으로 세계를 뒤흔든 다섯 명의 독재자가 사랑한 여자들을 만나본다.
 (※본 기사는 프랑스 작가 디안 뒤크레의 《독재자의 여인들》(SEEDPAPER, 2011), 《독재자를 사랑한 여인들》(문학세계사, 2012)을 참고했다.)
 
 
  1. [스탈린] 악연 혹은 운명
  나디아
 
   1917년 제정(帝政)러시아가 무너지고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도 유배생활을 마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두 번째 아내가 되는 16세 소녀 나디아(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 알릴루예바, 1901~1932)에게 반한다. 나디아의 집안은 스탈린과 이전부터 알고 지냈다. 그녀의 가족은 20년간 스탈린의 비밀조직을 지원하고 5년간 그의 숙식을 책임졌다.
 
  그들은 사랑의 감정을 느꼈으나 부부가 될 인연은 아니었다. 나디아가 성인이 된 1919년,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소박하게 결혼했으나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결혼 전 나디아는 울면서 ‘스탈린이 자신을 겁탈했다’고 아버지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이에 스탈린은 선수를 쳐 ‘나디아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예비 장인에게 호소한 것이었다.
 
  공산혁명이 완수되자 당시 최고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은 정부 개혁을 단행, 스탈린에게 민족인민위원이라는 직책을 내린다. 나디아는 이때 스탈린의 비서 겸 타이피스트로 기용된다. 1924년 레닌이 죽자 스탈린은 당 서기장에 올라 러시아 공산당을 통치한다. 그녀는 스탈린이 권력의 중심에 서자 자신의 친정이 주목받는 것에 큰 압박을 받았다. 결혼 생활 초기부터 둘 사이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나디아는 호화스런 크렘린궁에서 생활할 때도 기분이 우울했다. 엄숙하고 권위적인 궐내의 분위기는 그녀에게 사소한 놀이나 인테리어 장식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약관을 갓 넘긴 나디아와 달리 왕궁 여성들의 대부분은 50대였다. 소통이 될 리 만무했다. 그녀는 궁 밖으로 나가 개인적인 공부도 하면서 자유롭게 살길 원했다. 황금 철창을 쪼다 부리가 닳아버린 ‘조롱 속의 새’ 신세였다.
 
  무엇보다 부부는 의견 차이가 심했다. 공산주의 원리원칙에 투철했던 그녀는 스탈린이 조금이라도 부정한 일을 할 때면 거침없이 지적했다. 가령 한 공무원이 부당해고를 당했을 때 그녀는 스탈린에게 “노동자를 이렇게 대우하면 안 된다”고 꾸짖었다. 잦은 충돌에 스탈린도 심기가 불편했다. 아내가 자신에게 감추는 게 많다고 느꼈다.
 
 
  자식이 어찌 양처(良妻)가 되랴
 
  나디아는 자동차·경호원 등 일체의 호화생활을 거부했다. 대신 스스로 대학에 가서 공산주의 예술을 배웠고 글쓰기를 연마했다. 스물셋의 나이에 그녀는 가정보다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더 중시했다. 아내가 외곬 기질을 보이자 남편도 바깥으로 돌았다. 스탈린은 성욕 해소를 위해 수많은 여성과의 일회성 만남에 탐닉했다. 궁궐 미용사, 별장 하녀까지 덮쳤다.
 
  한편 스탈린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정적들을 축출하고 혁명 동지까지 숙청했다. 나디아는 그를 ‘권력에 반하면 부부의 연도 끊을 사람’으로 여겼다. 무르익는 스탈린의 권력만큼 부부는 갈등의 골이 깊어갔다. 1932년 11월 8일 밤, 스탈린과 나디아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당시 크렘린궁에서는 공산혁명 15주년을 기념한 대형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영부인이었음에도 술잔을 들지 않았다. 스탈린과 나디아는 그 자리에서 정책을 논의할 때도 다퉜다. 기분이 상한 스탈린은 담배꽁초, 오렌지 껍질을 던지면서 그녀를 비난했다. 나디아는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좌중은 혼란에 휩싸였다.
 
  변심한 스탈린은 연회석상에서 군사령관의 아내에게까지 추파를 던졌다. 나디아는 이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 권총을 꺼냈다. 총구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삽시간에 피가 번졌다. 그녀는 최고 권력자의 아내로서 억압받으며 산다는 것에 끔찍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유서 격의 편지는 아직까지도 그 내용이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충격적인 소문이 있다. 나디아가 사실 스탈린의 딸, 즉 혼외자식이라는 소문이었다. 실제 나디아의 어머니인 올가는 딸을 낳기 전부터 스탈린과 두 달가량 내연관계에 있었다. 당시 올가는 나디아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이는 진위 여부를 떠나 나디아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디아가 죽자 스탈린의 폭정은 더 심해졌다고 한다.
 
 
  2. [무솔리니] 낭인을 전사로 만들다
  안젤리카
 
   “가장 자극적인 포도주가 가득 담긴 크리스털 잔.” 네덜란드의 작가 엘렌 포레스트는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를 이렇게 비유했다. 실제 무솔리니는 젊은 시절 포악한 성정과 달리, 특유의 달변과 우람한 육체미로 귀족·지식인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첫 직업은 마을 교사였는데, 낭인·폭력배나 다름없이 생활하며 다수의 여성을 유혹했다. 주말마다 무도회장에서 여자를 찾았고 경쟁자에게 시비를 걸어 주먹다짐을 했다. 생활패턴이 말 그대로 ‘동네 건달’ 수준이었다.
 
  그는 군인 남편을 두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스무 살의 줄리아를 유혹해 밀통(密通)하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그녀가 곁을 떠나자 길거리에서 폭행하며 팔을 물어뜯는 등 만행에 젖어 살았다. 그는 집권 후에도 “여자들처럼 대중은 결국 유린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일평생 광기 어린 욕망으로 뭇 여성들을 유린하던 그도 ‘꼼짝 못하는’ 상대가 있었다. 바로 ‘연상의 여인’ 안젤리카 발라바노프(1878~1965)였다. 무솔리니는 1904년 3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파리코뮌(1871년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에 의해 수립된 혁명자치정부) 33주년 행사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갈색 머리에 마른 체형인 안젤리카는 연단에 올라 사회주의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었다. 당시 36세였던 그녀는 벨기에의 브뤼셀 자유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귀재였다. 당대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그녀는 훗날 공산주의 국제연합 ‘코민테른’ 서기,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당 당수에까지 오른다.
 
  운명이었을까. 그녀는 몰려든 인파 중에서 유독 무솔리니에게 마음이 갔다. 뒷날 안젤리카는 “그때 그처럼 비루한 인상의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당시 무솔리니는 노숙자나 다름이 없었다. 무일푼으로 스위스에 와서 건축·하역 잡부로 전전하고, 정육점·포도주 가게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노동자 신세였다. 일감이 없는 날이면 다리 아래서 잠을 잤다. 안젤리카는 오히려 행색이 남루한 그에게 묘한 동정심을 느꼈다고 한다.
 
 
  내조의 여왕
 

1938년 9월 28일 무솔리니(왼쪽)와 히틀러가 함께 차를 타고 독일 뮌헨 회담 장소로 향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안젤리카의 전폭 지원으로 무솔리니는 이민노동자조합에 가입하게 된다. 초청받은 조합 강연회에서 명연설을 펼쳐 이탈리아 사회당에 이름을 알린다. 무솔리니는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신랄한 어조로 민중의 마음을 샀다. 이후 당 서기관에 임명, 당 기관지에서 기사 작성 업무를 맡게 된다. 다섯 살 ‘연하남’에게 반한 안젤리카의 지극한 내조 덕분이었다.
 
  안젤리카는 일개 빈민에 불과했던 무솔리니를 번듯한 당내 언론인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멘토로서 그의 학문적 토대를 닦아줬다. 그녀는 여자에 대한 그의 욕망까지도 노련하게 간파했고, 이를 역이용해 ‘들개 같은’ 남자의 청춘을 쥐락펴락했다. 안젤리카의 지적 컨트롤에 혈기 방장한 무솔리니도 온순히 젖어 들었다. 실제 무솔리니가 평생토록 찬사를 거듭한 여성은 오직 안젤리카뿐이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만약 스위스에서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회당원으로 일요일 아침 시장에 나와 기관지를 파는 것에 만족하는 ‘소심한 혁명가’에 그쳤을 것이다.”
 
  실제 무솔리니가 1912년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 편집장직을 수락한 이유도 안젤리카가 부편집장으로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승처럼, 마치 어머니처럼 안젤리카를 원했다. 포악무도한 독재자는 연상의 여인에게서 인내의 미학, 파시즘 이론, 독서와 공부법 등을 배웠다. 배고픈 낭인이 이념의 전사로 환골탈태하는 순간이었다.
 
  다른 독재자들의 여인과 달리 안젤리카는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무솔리니를 지원했다. 무솔리니도 그녀에게 질펀한 성욕을 느끼기보다는 간간이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그들의 특별한 관계는 10년 동안 이어졌다. 1918년 안젤리카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떠나 러시아의 레닌 곁으로 가자, 무솔리니는 물론 그녀 뒤를 이은 또 다른 정부(情婦)들까지 아쉬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3. [히틀러] 비참의 시대, 철없는 순정
  에바
 
   때는 크리스마스의 고즈넉한 겨울밤, ‘철혈 독재자’에게 노란색 난(蘭) 한 송이를 선물 받은 여인은 누구일까. 어떤 매력을 지닌 여자였기에 피도 눈물도 없다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조차 반한 것일까.
 
  히틀러보다 무려 ‘23세 연하’였던 에바 브라운(1912~1945)은 독일 뮌헨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9년 에바는 17세가 되자 당대 사진작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하인리히 호프만의 사진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히틀러는 운명의 상대 에바를 만나게 된다. 실제 오늘날 알려진 대부분의 히틀러 사진은 호프만의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
 
  히틀러는 자기보다 스무 살 이상 어린 에바의 당돌함이 좋았다. 그녀는 남자들과 어울리길 좋아했고 공부를 싫어했다. 생활에 필요한 간단한 타자 기술, 회계 이론만 습득할 뿐이었다. 대신 스포츠를 즐겼고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장식품으로 치장한 뒤 영화배우를 꿈꾸며 로맨틱 영화 필름을 수집하는, 말 그대로 철없는 여학생일 따름이었다. 히틀러는 그녀의 허영심을 순수한 매력으로 여겼던 걸까.
 
  에바 역시 히틀러를 거쳐 간 이전의 애첩들 자리를 본인이 대신한다는 것에 질투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도 그를 오랫동안 짝사랑하며 관심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서로 정식으로 사귀는 동안에도 에바는 히틀러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을 갈구했다. 히틀러의 정치적 야망까지도 자기 손안에 넣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 1932년 11월 1일 심장에 총을 겨눠 자살 시도를 하는가 하면, 3년 후에는 극약을 삼켜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 요부(妖婦) 같은 행각들로 히틀러의 절대적인 사랑을 얻었다.
 
  때로 히틀러가 사나워질 때도 에바는 오히려 그에게 순종했다. 그를 탓하지 않고 자신을 책망했다. 히틀러의 언어는 에바에게 법과 같았다. 때로는 그녀 또한 히틀러처럼 강력한 독재자가 되고 싶었다. 에바는 ‘사랑의 독재자’로서 히틀러를 지배해 천하 권세를 쥐고 싶었다.
 
  사실 그녀는 대외적인 공식 직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장막 뒤에서 ‘내 남자’인 히틀러를 수렴청정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에바는 언젠가 히틀러 비서직을 받기도 했으나 정치에 참여한 일은 없었다. 대신 베르그호프의 휴양 저택에서 안주인 역할을 했다. 히틀러가 휴가를 내서 들를 때만 애인 노릇을 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여왕이자 어엿한 정실(正室)이었다.
 
 
  벙커에서 치른 죽음의 결혼식
 
1940년 히틀러의 애인 에바 브라운이 반라(半裸)의 몸을 알록달록한 우산으로 가린 채 활짝 웃고 있다. 히틀러는 에바가 반라 차림으로 수영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녀는 몰래 수영과 일광욕을 즐겼다고 한다. 사진=영국 《데일리메일》
  히틀러가 독일 총통이 되자 에바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 옷과 신발은 항상 최상의 신제품을 원했다. 하루 여섯 번 옷을 갈아입고 전담 미용사를 고용해 매일 헤어스타일을 바꿨으며 이탈리아까지 가서 명품 의류를 구해왔다.
 
  히틀러는 그녀를 대외적으로 감췄고, 귀빈을 사저로 초대할 때면 방에 가뒀다. 23세나 어린 애첩이 있다는 사실은 독일 총통의 위엄을 손상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혀’인 최측근 괴벨스도 전쟁이 끝나기 2년 전에야 에바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14년간 히틀러와 연인 관계를 맺고 베르그호프에서 8년간 거주했어도 존재 자체는 극비였던 것이다.
 
  그녀는 권력자와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 끝없이 치장했다. 한 여성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주는 치장만이 에바의 살길이었다. 그녀는 독일이 소련과 미국을 걷어내면, 유명 영화배우가 돼 할리우드에서 자신과 히틀러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리라 결심하기도 했다.
 
  에바는 점점 불리해지는 독일의 전황과 관계없이 호의호식했다. 국민들이 식량 배급에 허덕일 때 거북이 수프 등 희귀 요리를 즐겼다. 물자가 귀한 전시(戰時)에 오렌지를 주문하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먹으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착즙해 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1941년 히틀러의 잔혹무도한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날 때 에바는 스키를 즐겼다. 소련의 반격에 독일이 퇴각할 때도 에바는 바이에른 호수에서 수영하며 노닐었다.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퇴한 독일은 수렁 속으로 빠졌다. 3년 뒤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하고 폭격을 감행했다. 그때서야 에바도 독일의 최후를 직감했다. 그녀는 베를린에 도착해 히틀러와 함께 벙커로 들어갔다. 연인은 포성이 귓전을 때릴 때까지 의연하게 죽음을 기다렸다. 남성 심복들이 혼비백산하며 제 목숨 하나 건지기도 바쁠 때 에바는 자기보다 히틀러를 더 염려했다.
 
  1945년 4월 28일 저녁, 히틀러와 에바는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식을 올린다. 베를린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공증인을 부르고, 측근 괴벨스 외 1인을 증인으로 세웠다. 에바 브라운이 에바 히틀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이튿날 자살 계획을 세운다. 4월 30일 오후 3시30분, 히틀러와 에바는 권총 자살 직전 시안화수소산 캡슐을 나란히 삼켰다. 이윽고 단 한 번 총성이 울리고 침실의 문이 열렸다. 사랑의 끝은 매번 그렇듯 적막했다.
 
 
  4. [마오쩌둥] 호랑이를 탄 독부(毒婦)
  장칭
 
   “나는 38년간 마오쩌둥(1893~1976) 주석의 부인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동안 우리는 기쁨도 슬픔도 함께 공유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그를 끝까지 따랐던 여자는 단 한 명, 나였다. 당신들은 혁명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 1980년 반역죄로 법정에 선 장칭의 최후진술 중.
 
  1914년 3월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난 장칭(1914~1991)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이에 그녀는 당대 중국 여성의 족쇄였던 ‘전족’(纏足)을 스스로 풀고 주체적인 삶을 선언했다. 당시로서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파격적인 도전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유의 발’이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얻게 됐다. 후유증으로 평생 절름발이로 살게 됐지만 몸동작은 누구보다 유연했고 손가락의 움직임도 섬세했다. 정식으로 교육받진 못했지만 눈치가 빨라 상황에 맞춰 겸손하고 품위 있게 행동했다. 무엇보다 빼어난 입담으로 뭇 남성들을 사로잡았다.
 
  세상을 향한 그녀의 분노는 허영심을 키웠다. 연극배우에 실패하고 공산주의 문화해방 전선에 투신한다. 장칭은 마을 상인, 정치인, 영화평론가 등과 결혼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 야망에 부합할 만한 남자를 찾아 대륙을 떠돌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1930년대 말 그는 중국 옌안에서 열린 마오쩌둥 강의에 참석해 레닌과 마르크스 이론을 공부했다. 마오쩌둥도 그녀가 연극에서 열연하는 모습을 보고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당시 장칭은 물오른 미모의 20대 중반이었고, 마오쩌둥은 원숙한 40대 중반이었다. 마오쩌둥은 요양차 러시아로 떠난 부인과 이혼을 하고 장칭과 결혼했다. 당시 공산당 간부들은 장칭이 문란하고 분방하다고 지적, 그녀가 30년간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들의 결혼을 허용했다.
 
  마오쩌둥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장칭의 야망도 덩달아 불어났다. 그녀는 처음 당내에서 공식적인 직책 없이 몸을 낮추다가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마오쩌둥이 정적들에게 타격을 입자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마오쩌둥 대신 류사오치(1898~1969)가 주석에 오르자 장칭은 음해·공작을 시도했다. 공산당 간부들의 아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여론을 주도했다. 그녀의 계략은 성공해 마오쩌둥은 다시 정계무대로 복귀한다. 그녀의 지모(智謀)는 장기판처럼 일순 밀리면서도 회심의 일격을 가하는 저력이 있었다.
 
 
  ‘지옥도’ 문화대혁명
 
마오쩌둥과 장칭이 신문을 읽고 있다. 사진=바이두
  장칭은 영부인의 권위에 맞게 자신의 질탕한 과거를 역사에서 지우려고 했다. 1960년대부터 본인과 관련된 과거 기록을 지우도록 명했다. 친구·옛애인·직장동료도 모조리 옥에 가두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토록 악독하고 철저했던 장칭은 비로소 문화대혁명의 핏빛 서막을 여는 장본인이 된다. 1966년 문화공작 고문에 오른 그녀는 ‘과거 유물이 더는 존재해선 안 된다’는 명분으로 지식인들의 집에서 고전을 압수했다. 그해 7월 8일 마오쩌둥도 장칭에게 나라의 새 질서 확립을 위해 대란(大亂)을 일으키겠다고 선언한다. 장칭은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을 관부에 맞서도록 조장했다. 마오쩌둥의 권세를 등에 업은 그녀는 천하강산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아무도 장칭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녀는 정치·행정에 문외한이었지만 마오쩌둥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전횡했다. 사치도 대단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유구한 전통문명이 발본색원(拔本塞源)되고, 이에 항거하는 문인·학자·교사들이 참살(慘殺)되는 동안에도 향락은 그칠 줄을 몰랐다. 개인 동물원을 만들었고, 베이징 공원에서 승마를 즐겼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상영관에서 당시로선 희귀했던 외국 영화를 관람했다. 사진 찍는 취미에 푹 빠진 날에는 군함을 해안선에 일렬로 정렬시키기까지 했다. 바닷속 신비한 사진을 찍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오쩌둥이 노쇠하자 장칭은 그의 권세를 독차지했다. 마오쩌둥과 동지들을 이간질하고 전화를 도청했으며 그보다 먼저 서류를 검열했다. 전권을 일임받은 그녀는 숙적 저우언라이(1898~1976)와 덩샤오핑(1904~1997)을 동시에 축출하고자 했다. 1970년대 말, 그녀 서슬에 먼저 눌린 저우언라이는 죽고, 당시 덩샤오핑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장칭은 오직 본인만이 마오쩌둥을 계승할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자 장칭은 정적 화궈펑(1921~2008)과 덩샤오핑을 제거하기 위해 모략을 세운다. 그녀는 먼저 덩샤오핑 축출을 명분으로 화궈펑에게 회의 소집을 명한다. 이른바 ‘오랑캐로 오랑캐를 친다’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이었다. 하지만 장칭의 속내를 간파한 화궈펑은 이를 거절한다. 이후 장칭은 마오쩌둥의 조카에게 청병(請兵)해 1만 군사를 이끌고 베이징을 포위했지만, 이미 화궈펑과 덩샤오핑은 연합군이 돼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장칭의 보병과 연합군의 기갑부대가 베이징 외곽과 만리장성에 배치됐다. 함께 일어난 두 개의 쿠데타에서 장칭은 패전한다. 그해 10월 6일 밤 장칭이 검거되자, 국민들은 그녀의 학정을 성토하는 그림들을 거리에 내걸었다. 1980년 국가전복죄 및 ‘당 간부와 베이징 시민들을 학대한 죄’로 법정에 선 장칭은 종신형 수감 중 1991년 5월 14일 자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친다.
 
 
  5. [후세인] 권력의 동반자 ‘조강지처’
  사지다
 
   사지다 카이랄라 탈파(1937~)는 사담 후세인(1937~2006)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첫 번째 부인으로 1963년 맞선으로 결혼했다. 당시 사지다의 가문은 수뇌부 출신이라 후세인이 권력을 차지하는 데 배경이 됐다. 사지다는 남편의 정치적 부침에도 제자리를 지키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그녀가 첫 아이를 임신할 때 후세인은 감옥에 있었다. 사지다는 남편 옥바라지를 도맡으며 그가 탈옥할 수 있도록 계책을 건네주기도 했다. 1964년 7월 사지다의 말에 따라 후세인은 카페에서 교도관들에게 점심을 사주던 중 도망쳤다. 교도관들이 푸짐한 음식에 한눈을 판 사이 탈옥한 것이다. 이후 후세인은 반군에 조력하고 지하조직에서 활동했다.
 
  후세인이 정치에 투신한 뒤부터 사지다는 자녀들을 이끌고 살림을 홀로 꾸려나갔다. 사지다의 가문 아래서 후세인은 교육을 받았고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1970년대 후세인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지도자로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지다는 이라크식 현모양처의 표상이 됐다. 그녀의 조신하고 지혜로운 미덕이 세상에 부각됐다.
 
  1979년 대통령이 된 후세인은 이란과의 전쟁, 쿠웨이트 수복 등을 목표로 삼았다. 사회주의 운동가 시절 서방 강대국을 비판했던 그는 권좌에 오르자 국경 전쟁에 혈안이 됐다. 사지다는 활개 치는 후세인의 뒤편에서 조용히 그를 내조했다. 대통령궁의 살림을 도맡은 그녀는 사교 모임을 주도하며 왕비 노릇을 했다. 사치품도 그만큼 쌓여갔다. 유행을 중시한 사지다는 명품 의류와 보석 따위를 사들였다. 1981년 런던에 도착해 지인 20여 명과 함께 고급 상점가를 활보하기도 했다. 특히 고급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 제품들을 좋아했다. 그녀는 본인 치장은 물론 자신이 총애하는 여자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많은 상품을 비축해 놓았다. 그녀는 위엄과 포상으로 이라크 규방(閨房) 사회의 권력을 장악했다.
 
 
  시누이의 혀를 자르다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 군사들.
  사지다는 과격한 바깥주인 후세인을 내조하는 차분한 안주인 역할을 해왔지만 자식 농사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세 딸은 모델처럼 건방지게 굴었고, 허세로 가득한 두 아들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있었다. 낮이면 사냥터를 쏘다니고, 밤이면 그들이 머무는 요릿집마다 음주가무·주먹다짐에 강간과 화재까지 일어났다. 매번 화목하고 평범하게 언론에 비춰진 후세인 가정은 안으로 곪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후세인은 사미라 샤반다르를 후처로 들였다. 영부인이라는 사지다의 마지막 권위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강경 입장을 보였다. 누구도 자신에게 도전하지 못하도록 정적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사지다는 한 가족인 시누이에게도 독단적·설교적 말투로 쏘아붙였다. 등살에 못 이긴 시누이는 방송국 동료들에게 “사지다는 영부인 자격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 사실이 발각돼 시누이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시누이는 심문 중에 다시 올케 사지다를 저주했다. 사지다는 그녀를 교수형에 처하고 혀를 잘라내 시댁 가족들에게 보냈다. 며느리가 시누이를 죽여 그 시신의 일부를 잘라 시댁에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이고 살벌하다.
 
  사지다는 후처의 등장으로 후세인에게 이전만큼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순 없었다. 그러나 가족 단위로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안주인으로서 후세인 일가를 완벽히 지배했다.
 
  걸프전 패퇴와 미군의 이라크 침공으로 후세인 정권은 파국을 맞았다. 후세인이 몰락하자 사지다 역시 궁에서 쫓겨나 이라크를 떠났고 남편과 영원히 재회하지 못했다. 사지다는 이름 모를 외국에서 남편·아들·손자·남동생이 차례로 죽는 것을 봐야 했다. 2003년 이후 행방불명된 그녀는 당시 이라크 반군에 자금과 물자를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2006년 11월 5일 후세인은 미군에 체포돼 사형이 내려질 당시 본처 사지다에게 마지막 시를 남겼다. “내 마음은 아직도 여리기에, 나는 언제나 사랑을 할 수 있다오.”⊙
    
글 | 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주석] 혼군 [昏君]-사리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