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시론] 위헌적 역사교과서로 학생 가르치라고?

바람아님 2018. 5. 15. 14:08


중앙일보 2018.05.15. 01:25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 빼려는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은 위헌적
국가 정체성이 걸린 헌법적 문제
대한민국의 미래 왜곡할 수 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역사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개인과 국가의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분노하고 우려하는 것도, 대한민국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교과서가 논란이 되고, 역사교육의 내용이 바뀌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최근 교육부에서 발표한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은 그 내용의 위헌성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역사교과서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국가에 대해 교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위헌적인 것이라면 어떤 일이 생길까.


학생들에게 법률로 금지하는 범죄를 가르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는 것처럼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학교 교육에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에 대해 잘못된 내용, 위헌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당장의 법적·헌법적 문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왜곡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다. 국가 정체성의 사실적 측면에서 강조될 수 있는 것이 한민족의 역사적·문화적 공통분모라면, 규범적 측면에서 더욱 중요시돼야 할 것이 헌법의 핵심적 가치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다. 인권과 민주주의·법치주의라는 인류 보편가치의 핵심적 요소를 어떤 경우에도 침해되지 않는 ‘근본가치’로서 강조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사이비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특히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대립해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했던 것은 민주주의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기 다른 유형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사이비 민주주의와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분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역사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바꿈으로써 마치 민주주의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를 통합해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위헌적인 것이다.

시론 5/15
헌법 제4조는 남한과 북한의 공통분모가 아니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는 통일의 대안일 수 없다. 그런데 역사교과서는 왜 이런 점을 간과하고 있는가. 3월 26일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에서도 ‘자유’를 빼지 않는 것으로 했는데, 왜 역사교과서에서 이를 들고 나왔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1948년 5·10 총선 당시와는 달리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이뤄짐으로써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볼 수 없다는 취지에서 해당 문구를 삭제하기로 했다는 것은 헌법 제3조와 관련해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48년 제헌헌법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고, 그 취지는 대한민국 헌법이 남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명시하기 위한 것임을 제헌헌법의 기초자인 유진오 박사가 밝힌 바 있다. 이 조항에 근거해 북한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반국가단체로 인정된 것이다.


87년 헌법개정을 통해 평화통일 조항(제4조)이 도입되고, 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이뤄진 이후에 제3조와 제4조의 관계가 헌법학계에서 깊이 논의됐다. 당시 헌법 제3조가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된 것이라는 해석도 일부 있었지만, 동·서독 관계를 참고해 남북한 관계도 양면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도 이러한 견해에 따라 판례를 형성했다.


즉, 북한과의 관계에서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또는 적화통일 위협에 대처할 필요성(국가보안법 등)과 평화적 통일을 위한 교류·협력의 필요성(남북교류협력법 등)이 동시에 인정된다고 본 것이다. 전자는 헌법 제3조에 근거하고, 후자는 헌법 제4조에 근거한 것이다. 대북 관계에서는 어느 한쪽만이 아닌 양쪽 측면이 동시에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확고한 판례다.


헌법 규정 및 헌법재판소·대법원의 판례에도 불구하고(이미 법적으로 정리된 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근거로) 위헌적인 내용을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으로 정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정말로 역사교과서에 이념적 색깔을 덧칠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헌법과 법률에 맞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말인가.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