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8.04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1·2차 대전 반성으로 태어난 EU… 지금은 지중해 곳곳서 "탈퇴" 목청
'상상의 공동체'를 쓴 베네딕트 앤더슨 동생이 저자
대전환의 세기, 유럽의 길을 묻다
페리 앤더슨 지음|안효상 옮김|길|762쪽|4만원
유럽연합(EU)의 심장박동은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시작됐다.
두 번의 전쟁이 초래한 끔찍한 결과를 목도한 유럽은 민족 간 전쟁을 막을 새 질서를 열망했다.
그 움직임의 중심에 프랑스가 있었다.
1차대전 후 군사·경제적으로 독일을 억누르려 했던 프랑스가 독일을 가장 가까운 동맹국으로
묶어두는 쪽으로 선회했다.
첫 움직임은 1950년 불·독 양국이 합의한 쉬망 계획. 이 계획에 따라 이듬해 석탄철강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경제적 유대 복원을 통해 독일의 재무장을 막으려 했고, 독일은 전승국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 복귀하려 했다.
1957년 로마조약 체결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결성된 이후 70년간 '하나의 유럽'이라는 꿈은 수많은 지식인을
매료시키는 정치적 지향점이었다.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2005년 발간한 저서 '포스트워 1945~2005'에서 EU에
"유럽인과 비유럽인 모두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꼽는 가치공동체"라는 찬사를 보냈다.
영국 역사학자이자 좌파 저널 '뉴레프트 리뷰'의 편집위원인 저자 페리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를 쓴 석학 베네딕트
앤더슨의 동생이다. 페리 앤더슨은 EU의 태동에서부터 1999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따른 유로존 출범을 거쳐
소련 붕괴와 독일 통일에 이르기까지 유럽연합이 겪어온 통합을 향한 노력과 좌절의 역사를 조망한다.
유럽연합은 명암이 함께 기록된 이중장부다.
저자는 통합을 향한 대장정의 이면에서 유럽을 분열시키는 원심력이 강력하게 작용해왔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EU에 쏟아진 모든 찬사는 '도취'이며 '정치적 허영심'이고 '끝 모를 나르시시즘'이라는 비난의 메아리를 울렸다.
본질적인 한계는 유럽연합의 초(超)민족적인 형태가 구성원의 주권·다양성과 충돌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유로화(貨)가 불러온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이다. 경제 실력이 제각각인 나라들이 하나의 화폐 아래
묶일 때부터 파국은 준비돼 있었다는 것. 슈뢰더 총리 시절 독일이 하르츠 개혁을 통해 저임금에 바탕한 경제부흥을
추진하자 독일보다 실력이 처지는데도 유로화에 묶여 통화 가치를 절하할 수 없었던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경제는
경쟁력을 상실했고 국가부채가 쌓였던 사실을 예로 든다. 독일의 긴축 요구에 지중해변 나라의 국민들은 "EU 탈퇴" 구호로
맞섰다. 소련의 붕괴 이후 저임금 노동력으로 무장한 동유럽 국가들이 EU에 가입한 것도 원심력을 가속했다.
EU에 내재한 태생적 비민주성도 분열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유럽연합 행정부인 유럽집행위원회를 비롯해 사법재판소와
각료이사회는 민주적 선출 과정을 통해 구성되지 않는다. 유일한 선출기관인 유럽의회는 과세권도 법률발의권도 없다.
결국 EU의 현실은 관세동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나흘 앞둔 2016년 6월 19일 영국 런던 의회광장에서 영국의 EU 잔류를 기원하는 키스 이벤트가 열렸다.
작은 사진은 영국독립당 대표 나이절 패라지(왼쪽 끝)가 같은 달 13일 켄트주 시팅본에서 EU 탈퇴 지지 시위를 벌이는 모습.
/EPA·AFP 연합뉴스
유럽연합을 잉태한 프랑스에서조차 통합 반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사르코지는 집권할 때 "소아시아가 유럽의 일부가 아닌 것은 학생들도 안다"며 터키의 EU 가입을 반대했다.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북(北)키프로스를 무단 점령했으며,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인하는 태도 역시 터키의
EU 가입 걸림돌로 꼽힌다. 그럼에도 저자는 "동유럽을 받아들인 것처럼 이슬람 민주주의 나라를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에르도안이 집권 후 군부 역할을 축소시킨 것도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터키에서 군부야말로 이슬람 원리주의의
부상(浮上)을 저지하고 유럽식 세속주의를 지켜온 보루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저자의 이런 견해는 속단으로 보인다.
저자는 유럽연합의 역사뿐 아니라 그 안에서 복잡하게 얽힌 국가 간 이해관계, 2차대전 후 각국의 역사와 문화 등을
망라하며 방대한 지식을 풀어놓는다. 그러나 2009년 출간된 이 책은 그 후의 극적인 변화를 담지 못했다.
2010년 이후의 유럽 통합과 갈등의 전개 양상은 역자가 정성 들여 쓴 옮긴이의 말을 통해 보완했다.
'아랍의 봄'이 촉발한 난민사태와 잇따른 테러 범죄가 유럽 내에 극단적인 이민자 혐오와 우파 포퓰리즘 정당의 득세를
불러온 점을 설명하고,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라는 결정타를 맞은 이후 "토니 주트가 말한 국제적 미덕의 모델로서
유럽이 지속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전망했다. (원제: The New Old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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