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10.05 한현우 논설위원)
글쓰기 강의를 맡은 첫 시간이면 늘 읽히는 글이 있었다.
어느 교수가 신문에 기고했다 퇴짜 맞은 원고다. 스크린에 띄워놓고 첫 문장만 읽으라 한 뒤 묻는다.
"이 글이 뭘 주장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분 있나요?" 아무도 없다.
무려 일곱 절(節)이 얽히고설킨 문장은 정작 주절(主節)의 주어가 없는 비문(非文)이다.
한 문장이 261자에 이르는, 장대하게 못 쓴 글이다.
첫 수업에 다들 '저 교수님보다는 잘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다.
▶글쓰기는 이래저래 괴로운 작업이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조카가 속상한 일이 있다고 했다.
'~에 대해 알려드립니다'라고 공문에 썼더니 상사가 '안내드립니다'로 써야 한다며 꾸중했단다.
'알려드립니다'가 더 좋은 표현인데 '안내'를 꼭 넣고 싶으면 '안내해 드립니다'라고 써야 한다고 알려줬다.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전달드립니다' 같은 괴상한 말이 나돌기에 의아하게 생각했더니, 이렇게 퍼지고 있었다.
▶대구 경상여고는 2014년부터 학생들에게 인문학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거나 토론을 벌이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 전국 '잘 가르치는 베스트 일반고' 11곳 중 하나로 꼽혔다.
이 학교 도서관 장서는 5만권이 넘어 한 학생에 61권 규모다. 웬만한 전문대의 배가 넘는다.
교사들은 "쓰기 교육이 학업 역량을 크게 높여준다"고 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글을 쓴다는 건 자기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인류가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다 문자를 만들고, 종이와 인쇄술을 발명한 것도 정리된 생각을 후대에 남기려 한 일이다.
생각이 정리되면 창의적 발상으로 발전한다.
요즘 아이들은 동영상조차 15초가 넘으면 지루해한다.
15초 안짝 동영상만 올릴 수 있는 중국 앱 '더우인'이 그래서 지난 1분기 앱 다운로드 1위에 올랐다.
거꾸로 생각하면 세태가 이러니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질 높은 삶을 살 가능성은 더 높을 수 있다.
▶글쓰기란 괴로운 일이지만 그만큼 기쁨과 보람을 준다. 경상여고는 그걸 가르치고 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도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쓰기를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라고 했다.
힘겨운 운동을 해야 근육이 커지듯 글을 써야 생각의 근육이 자란다.
경상여고 학생들은 저마다의 인생 항로로 나아갈 것이다.
그 항해가 어떤 것이든 글쓰기로 키운 생각의 근육이 큰 힘을 발휘할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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