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8.13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이웃이 엘리베이터에 감자 내놓자 답례로 초콜릿·나물 채워 넣어
인간은 상대 好意에는 보답하고 배신은 앙갚음하는 호혜적 동물
오늘날 미국의 동남부 지역은 체로키 인디언족(族)의 땅이었다.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늘 서로 싸우는 늑대가 두 마리 사는데
한 녀석은 불신, 적개심과 이기심에 가득하고
다른 녀석은 신뢰, 자비와 친절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물어본다.
"결국 둘 중 어느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는 인생의 내공이 담긴 대답을 해 주신다.
"네가 먹이를 주는 녀석이 살아남지."
이처럼 인간이 온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은 철학 책이든 일상 경험을 통해서든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음식을 나누고 서로 돌보기도 했지만,
경쟁자와는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려고 잔악하게 싸우며 심지어 그의 목숨을 빼앗기도 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한가 악한가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우문(愚問)이다.
생존을 위해 인간은 위 이야기에서 언급한 늑대 둘을 모두 품게 됐다.
그렇다면 두 본능 중 어떤 것이, 언제 더 지배적으로 나타나는가?
중요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타인에 대해 갖고 있는 그 사람의 믿음 또는 추측이다. 사람은 받는 만큼 되갚는다.
사회심리학에서 하는 실험 중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이 있다.
두 사람이 짝을 이루어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 협력하거나 배신하는 결정을 관찰하는 연구에 쓴다.
이때 가장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전략은 '팃-포-탯(tit-for-tat)'이다.
상대가 배신하면 자신도 배신하고, 상대가 호의를 베풀면 협력으로 보답한다.
한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전략이다.
호혜성에 바탕을 둔 이 전략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터득한 단순하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타인 대응책이다.
이런 본능은 실험실 밖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만약 다른 사람 대부분이 서로를 이용하고 갈취한다는 생각을 지배적으로 한다면 그 사람은 늘 두꺼운 갑옷을 입고
다른 사람과 교류할 것이다. '항상 의심하고, 손해 보지 말고, 싸워라'가 그 집 가훈(家訓)이 되며,
그와 만나는 상대도 거기에 상응하는 방어적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다.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러한 정서적 기류는 멀리 뻗어나간다.
파밍턴(Farmington)이라는 미국의 작은 마을 주민들의 정서 변화를 수십년간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한 개인의 행복감은 그의 친구의 친구('3촌 관계')까지 전파된다고 한다.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서는 이처럼 전염성이 크다.
이때 전염되는 정서의 온도는 상대 모습을 어떻게 머릿속에 그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런 판단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정보의 '가시성'이다.
연일 사기·부패·범죄 소식만 접하다 보면 실제보다 세상을 어둡게 보게 된다.
가령 뉴스에서 접하는 비행기 사고 현장은 참혹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공 사고 사상자가 식도에 음식이 막혀 죽는 사람보다 많다고 착각한다.
근원적 해결 없이 부정적 사건을 반복 보도하는 것은 사람 대부분이 가진 선(善)함을 잊게 만든다.
다행히 뉴스 속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지난주 출근하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감자 박스를 보았다.
붙어 있던 메모를 보니 누군가가 이웃과 감자 나눔 행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이라이트는 퇴근길에 목격했다.
감자 한 묶음씩을 가져갔던 이웃들이 감사 메모와 함께 온갖 집안 보물로 박스를 다시 채워 놓았다.
배 즙, 나물, 나는 평소 아끼던 초콜릿으로. 인간은 호혜적 동물이다. 그
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모두가 더 즐거웠을지 모른다.
좋은 사람이 아직 많다는 위안을 서로에게 선물했기 때문에.
이웃 감자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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