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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문재인 정부의 ‘위험한’ 유전자

바람아님 2019. 1. 5. 09:07
[중앙일보] 2019.01.04 00:26

‘우린 다르다’ 선민의식 못버리면
‘뭐가 다르냐’ 국민 환멸 불러온다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의 유전자가 첨단 바이오 과학과 만났다. “유전자 가위를 통해 나쁜 유전자를 제거하듯 조국 민정수석이 (밑에서 올라온) 블랙리스트를 걸러냈다.” 지난해 마지막 날 국회운영위 한 여당 의원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현 정부의 도덕적 자부심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줬다. 우생학적 우월성에 생명공학 기술마저 결합했으니, 이제 정권의 도덕성은 ‘불순물’ 하나 파고들 틈이 없게 된 걸까.
 
유전자는 힘이 세다. 머나먼 원시 수렵 시절 축적된 우리의 유전자는 아직도 굳건히 작동한다. 인간의 행동과 감정이 자주 이성을 배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만 년 농업의 역사는 문명과 사회에는 긴 시간이지만, 생물학적 변화를 불러오기엔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깨버린 실험이 있다. 드미트리 벨라예프라는 옛소련 유전학자의 은여우 실험이다.
 
벨라예프는 1959년 새끼 은여우 중 인간을 무서워하지 않는 놈들만 골라 교배를 시작했다. 몇 세대가 지나자 여우의 성격이 온순해졌다. 아홉 세대만에 신체 형질마저 바뀌었다. 머리와 가슴에 하얀 털이 생겨났고, 턱과 이빨 크기가 줄었으며, 곧게 뻗어 있던 꼬리는 동그랗게 말리기 시작했다. 벨라예프 사후에도 계속된 실험에서 여우는 30세대 만에 애완동물로 분양할 수 있게 됐다. 여우의 ‘야생 DNA’가 ‘가축 DNA’로 바뀌는 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반세기였다. 타고난 유전자? 그렇게 믿을 만하지도, 견고하지도 않다.
 
생물학적 유전자도 이럴진대 ‘사회적 유전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사회에서 유전자처럼 전승되는 문화적 요소를 ‘밈(meme)’이라 고 했다. ‘밈’의 변화 속도는 생물학적 유전자(gene)에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전광석화 수준일 터다. 여당 대표가 꿈꾼다는 50년 집권 후가 아니라 당장 대통령 임기 5년 사이 정권의 유전자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유전자는 다르다’는 우생학적 선민의식은 위험하다. 역사적으로 적대와 배제, 폭력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동반했다. 나치, KKK, 인종주의가 그 예들이다. 청와대에 깔린 도덕적 선민의식도 우려스럽긴 마찬가지다. 문제투성이 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정의를 외친다. 반대 진영의 비판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다. 그 결과? ‘뭐가 다르냐’는 국민의 환멸일 가능성이 크다.
 
현 정권의 유전자가 전 정권들과 크게 다른지조차 사실 의문이다. 정부는 숱한 우려에도 눈 깜짝하지 않고 최저임금법 시행령을 의결했다. 국민 불안감은 안중에 없이 미국산 쇠고기를 들여왔다가 된통 당했던 전전 정부의 불통 유전자와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가. 내부 비판을 ‘배신의 정치’ 운운했던 전 정권의 유전자와, 내부 제보자를 ‘미꾸라지’ ‘불순물’로 매도하는 현 정부의 유전자는 뭐가 다른가.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지상의 생물들을 지배하는 것은 동일한 유기화학적 원리”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우리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동일한 권력 원리’라고 인정하는 편이 훨씬 솔직해 보인다.
 
‘순수한 유전자’는 위험하다. 접붙이기나 꺾꽂이 같은 무성생식 재배는 유전자가 섞일 위험이 없는 데다 효율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특정 병에 노출되면 어이없이 전멸할 위험이 크다. ‘포도뿌리혹벌레’(필록세라)라는 병충해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19세기 유럽의 포도, 1960년대 파나마병 때문에 사라져 버린 식용 바나나(그로 미셸 종)가 그랬다. 약효가 다한 구시대적 정치 유전자 풀에서 벗어날 줄 모르다 한순간에 익사해버린 직전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꼭 식물의 세계나 지나간 역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