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범철 칼럼] 진실의 순간이 보여준 北 협상전술의 민낯
디지털타임스 2019.03.04. 18:25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중단으로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실질적인 제재를 모두 해제해 달라는 북한의 주장을 듣고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김정은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이니 완전한 비핵화 운운하더니 결국 그들이 내놓을 것은 영변뿐이었다. 아마도 다음 번에는 미공개 농축우라늄 시설 내놓을 테니 한미동맹 해체하라고 했을 것이다. 북한은 말로는 비핵화 협상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핵보유 협상을 하려 했다.
영변 핵시설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간 공개하지 않았던 미공개 농축우라늄 시설이다. 이것을 일부라도 숨길 수 있느냐에 따라 완전한 비핵화가 가능한가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은 미측이 구체적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데도 끝내 협상을 거부했다. 리용호 외무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발언을 반박하는 자리에서도 미공개 농축우라늄 시설을 '다른 곳'으로 지칭했다. 혹시라도 미공개 농축우라늄 시설을 시인하는 뉘앙스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완전한 비핵화를 말하면서 모든 것을 다 인정하지 않았다. 진실은 숨기는 자의 편이 아니다.
북한은 자신들에 대한 11개의 제재 중 일부를, 그것도 민생과 관련된 제재만을 해제해 달하고 했음을 강조하며 마치 미국이 부당한 협상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했다. 하지만 이는 교묘한 말장난이다. 북한이 주장한 2016년 이후 대북제재 5개는 현재 북한을 아프게 하는 대북제재의 전부다. 북한의 끊임 없는 핵개발로 인해 2016년부터는 북한 경제를 전방위로 압박함으로써 핵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제재를 만들었다. 그 이전의 제재는 북한과의 무기거래를 차단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북한이 제재를 해제받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내려놓으면 된다. 그런데도 마치 피해자인 양 그간의 북한 행보 치고는 드물게 '민생'을 강조했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이야기한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은 기가 찰 정도다. 자신들이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해서 만든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인 만큼, 이제는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고 있으니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돈을 빌려간 채무자가 이제부터 더 돈을 빌려가지 않을 테니 이제 나보고 돈 갚으란 소리를 하지 말라는 논리다. 꼼꼼히 따져보면 북한은 말로만 비핵화 대화를 한다고 했을 뿐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번 하노이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협상 전술의 민낯을 드러냈고 이를 간파한 미국으로부터 제대로 되치기를 당했다. 소위 새로운 협상 방식이라는 탑다운(top down) 방식의 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을 공략하기 위한 북한의 협상 전술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례 없던 영변 핵시설을 내주었으니 외교적 성과로 홍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재완화를 얻어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을 잘 모른다 해도 이성마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동산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협상가 답게 '무거래'(no deal)을 선언하며 상황을 반전시켜 버렸다. 김정은 위원장을 끝까지 추켜 세워주는 우아한 모습도 잃지 않았다. 반면 북한은 모든 것을 잃었다. 대북제재로 인해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약점을 노출시켰고, 영변 이후부터는 협상이 더 까다로워질 것임을 주지시켰다. 그들이 유리하다고 착각했던 탑다운 방식의 협상도 결국 초조한 모습을 노출한 김정은 위원장의 실수로 더 이상 활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젠 북한이 진정한 비핵화 의지를 가지고 그에 합당한 로드맵을 준비해야 한다. 미국도 더 이상 속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하노이 정상회담은 성과 없이 종료되었지만 빈손 협상은 아니다. 오히려 북핵협상의 진실이 밝혀진 의미 있는 계기였고 핵을 머리위에 이고 살 위기에 빠질 뻔 했던 한국을 구해준 순간이었다. 동시에 앞으로도 똑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협상이었다.
우리 정부는 다시 중재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미국에 대해 제재완화를 요구하는 쪽이라면 곤란하다. 나타난 진실을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반쪽 외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북핵 협상은 이미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임기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상황을 잘 관리하며 한미동맹을 튼튼히 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개해야 한다. '우리가 잘 해주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희망적 상상은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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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정은 '비핵화 쇼'에 놀아난 1년
문화일보 2019.03.04. 12:00
이현종 논설위원
지난해 3월 정의용 訪北→訪美
1년 뒤 트럼프 ‘영변+α’검증
‘완전한 비핵화’ 거짓말 들통
신기루 좇은 文대통령과 靑
북핵 不變, 우리만 안보해제
한·미 동맹 강화에 집중해야
지난해 3월 5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특사단장으로 하는 특사단은 평양을 방문,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3시간 동안 면담을 하고 돌아와 “김 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발표했다. 8일에는 백악관을 찾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김 위원장의 의지와 미·북 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전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 실장 말을 듣자마자 기자들 앞에서 정 실장이 직접 발표하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자신이 발표하면 왜곡될 여지가 있는 만큼 정 실장이 직접 하라는 것이었다. 이날 발표가 지난해 6·12 싱가포르 센토사 1차 정상회담에 이어 2·28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됐다.
1년 지나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진정한 비핵화 의지를 가늠할 결정적 카드로 영변 핵시설을 포함한 다른 핵시설에 대한 검증과 사찰을 주장했지만 김 위원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북핵 폐기 의지가 있었다면 미국 측이 구체적인 자료를 근거로 제시한 추가 핵시설에 대해 당황하거나 모른 척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이제 비핵화의 근본적 의지가 없음을 사실상 시인한 셈이다.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에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지난 2002년 북한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원심분리기 제작에 쓰이는 고강도 알루미늄관의 통관자료를 제시하자 놀란 강석주 당시 북한 외무성 부상이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는 발언으로 2차 북핵 위기가 초래된 상황과 아주 닮았다.
중매를 잘 서면 양복이 한 벌이지만 못 서면 뺨이 세 대라고 했다. 2·28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중재자를 자임해온 문재인 대통령의 처지가 난처하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협상 결렬 후 돌아가는 길에 문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대화해서 그 결과를 알려주는 등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액면 그대로 보면 앞으로 문 대통령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한 말이지만 반대로 ‘중재하려면 똑바로 하라’는 뼈있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난 1년간의 ‘거짓 비핵화 쇼’의 발단이 된, 정 실장이 김 위원장에게 들었다는 비핵화 의지는 무엇인지 의구심이 든다. 하노이 회담에 앞서 미 고위관계자가 “비핵화 개념부터 다시 논의하고 있다”고 밝힌 것을 보면 정 실장이 김 위원장에게 들은 것은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 즉 미국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라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이후 3차례 남북정상회담에서도 문 대통령은 북핵 폐기라는 말 대신 ‘완전한 비핵화’라는 말로 김 위원장의 의지를 대변해 온 것이다. 북한의 진심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방안을 미국과 협의하겠다”는 뜬금없는 입장을 밝혔다. 김 위원장의 가짜 비핵화 의지가 만천하에 드러난 상황에서도 제재 해제를 못 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한·미 간 신뢰가 쌓일 수 없다. 이번 하노이 회담 결렬 직전 문 대통령이 대북 경협을 본격화하기 위해 안보실 1, 2차장을 교체한 것만 봐도 미국 기류를 읽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문 대통령과 그 주변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라는 신기루만 좇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니 현실이 제대로 보일 리 없다. 집단사고와 편의적 낙관론(wishful thinking)의 비극적 결말이다. 협상을 하려면 상대방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것이 제1원칙이다.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1차 북핵 위기 이후 북한은 수차례 협상과 도발로 국제사회를 속여 오면서 시간을 벌었다. 북핵의 흑(黑)역사를 제대로 보지 않고 그저 김정은 말 한마디에 춤을 춰온 참담한 결과가 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북핵은 하나도 변화가 없는데 9·19 남북군사합의서를 통해 안보는 무장 해제 직전이다. 이제 연례적으로 해오던 ‘키리졸브 연습’ 등 한·미 연합훈련도 중단됐다.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한·미·일 삼각체제마저 흔들리고 있다. 미국 국내 사정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문제에 적극 개입할 여건이 어려워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문 정부는 안보부터 다잡아야 한다. ‘신한반도체제’ 운운하기에 앞서 지금의 한·미·일 안보동맹부터 강고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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