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12.20. 00:29
문제의식 확실히 갖고 기존 생각·인식 담대히 바꾸길
그러나 지금 대다수 국민을 극도로 우울하게 하는 것은 현재의 고통보다 엄습해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수축(收縮)사회이고 축소불균형(縮小不均衡) 경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닥쳐올 미래를 걱정하며 집단 우울증에 빠지는 것 같다. 국정 품격이 땅에 떨어지고 사회의 금도와 도덕성이 크게 흔들리는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속은 무언가 확인하기 힘든 분노로 채워져 간다.
문재인 정부가 쏠림과 질주 속에 밀어붙였던 진보정책은 악순환의 고리 속에 빠져들고 국정 각 분야에 걸쳐 심각한 경고음이 커지기 시작했다. 민생경제는 말할 수 없이 피폐해지고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데 외교·안보 상황은 다시 위험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훼손된 대한민국 공동체의 신뢰자산
이러한 현실은 심각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여러 상황을 종합할 때 새해는 대한민국과 문재인 정부가 지나가야 할 마(魔)의 계곡이 될 것 같다. 모두가 국가 미래에 대하여 좀 더 냉정한 자세로 치열해져야 할 때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했다. 당시 갑자기 다가온 집권 기회 앞에서 문재인 정부는 미래를 향한 큰 그림을 갖지 못했다. 그러면서 촛불광장의 광풍에 휩쓸려 들어갔고, 일부 진보학자와 시민사회가 진영 논리로 급조한 공약집을 경전 삼아 촛불로 무엇이든 그을리고 태우려 했다. 이 과정에서 지난 60여년의 간난과 분투 속에 우리 모두가 함께 이루어 놓은 축적과 궤적과 신뢰자산은 상당 부분 소실되거나 훼손되었다.
무엇보다 촛불 만능주의 속에서 집권 세력은 국정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집권 초기 문재인 정부는 국정 주도권을 강력하게 장악했다. 야당은 지리멸렬했고 반대 세력들은 숨을 죽였다. 촛불이 정의·공정의 대명사로 세워지고 급진 진보정책이 맹위를 떨쳤다. 이 사이 급진운동권 세력과 진보 시민사회가 파워엘리트 자리를 꿰어찼고 그들은 청와대 등 주요 자리에 포진되어 진영의 파수꾼 역할을 하였다.
이들을 견제해야 할 국회와 언론은 촛불의 광풍에 위축되고 일부 명망가들은 파상적 벌떼 공격을 받고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지식 세계가 가치 추구 대신 생존 지향으로 연명하는가 하면 관료사회는 현실 적응력을 키우며 굴종하지만 추종하지는 않는 특이한 모습으로 진화하는 모습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일부 싱크탱크의 외침과 울림, 현인들의 금과옥조는 마이동풍에 사라져버리곤 했다.
마구잡이 적폐 청산으로 국가생태계 파괴
그 결과 안목과 지혜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적폐 청산이 진행되면서 국가생태계 전반에 걸쳐 침하 현상이 나타났다. 생태계 내부의 역동성과 회복력도 크게 약화하고 있다. 특히 탈원전 정책은 에너지생태계를 침하시켰고, 부동산 정책은 계속 시장에 농락당하고 있으며,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영세상인과 자영업 생태계를 파괴했다. 진보 교육감들이 주도하는 교육정책은 근본을 잃고 길을 헤매며 교육생태계를 회생불능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이 과정을 지켜본 다수 국민은 이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로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우려한다.
문재인 정부는 경제가 정체기를 넘어 장기 침체기에 본격 진입하는 분기점에서 집권했다. 이런 시대 상황에 대한 몰(沒)이해로 상처 난 곳에 소금 뿌리듯 반시장적 진보정책을 밀어붙이다가 시장의 역습에 휘말려 침체를 가속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지적한 대로 지난 반세기 내 최악의 경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이 기업가 정신과 근로 정신 모두를 퇴영시키게 된 것은 우리를 뒷걸음질 치게 하는 역사적 실수가 아닐 수 없다.
또 북한 비핵화 문제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고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로 되는데 이에 대한 근본 대응책은 별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미국대로 점점 한·미동맹을 절대적 가치보다는 상대적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김정은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집착, 과거지향적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세계관은 심히 걱정스럽다. 우리 외교가 신뢰의 위기에 빠지며 한·미동맹, 한·미·일 공조에 균열 현상을 보이면서 동북아시아의 외교·안보지형이 동요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도 청와대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읽고 싶은 것만 읽는 확증편향증후군(確證偏向症候群)에 빠져 위기의 경고음을 듣지 못한다. 그래서 읍참마속 대신 내로남불로 일관했다.
국정 실패가 자명해지는데도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단단히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집권세력은 “우리는 성공하고 있다, 진보세력이 얼마나 강성해졌느냐, 자생적 진보가 얼마나 늘어났느냐”고 외쳐댄다. 그리고 예산만 헬리콥터에 싣고 계속 지지층에 집중해서 뿌리면 40% 이상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다며 잘못된 자기확신에 빠진다. 지식인들은 포퓰리즘에 익숙해진 우리 국민이 아르헨티나 국민처럼 단맛에 길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심히 우려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긍정적 유산을 미리 당겨서 써버리고 부정적 유산만 넘겨주게 될까 봐 미안한 마음 이를 데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청와대
우리는 과거의 폐쇄회로에 묶여있다. 그리고 작아진다. “꽉 막히고 능력 없는 자가 가장 애국하는 길은 중요한 자리를 맡지 않는 것이다.” 과거 내 직속 상관의 촌철살인이었다. 지금 이것이 되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 베이징대의 저명한 원로교수가 나에게 “한국 국민이 그렇게 재주가 많고 똑똑한데 왜 좋은 지도자는 키우지 못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것이 극심한 인물생태계의 침하 때문이라고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진영 이기주의와 과거 지향에서 벗어나야
과거 실패한 대통령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국정 전반부에 대한 진솔한 자기반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가파른 하산 길을 내려가는 문 대통령은 지금부터 그동안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명확히 해야 한다. 가장 먼저 모든 국민의 대통령으로 복귀하고 그 시각에서 그동안 가졌던 인식의 세계와 자기확신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담대하게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국가의 미래를 경작(耕作)해야 한다.특히 정의·공정·촛불정신을 오도하며 국민을 분열시키고 지난 세월 우리 모두가 이룬 축적·궤적을 적폐로 생각한 인식 오류, 국가공동체 이익보다 진영 이익을 우선할 수 있다는 진영 이기주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비현실적 환상과 자기확신, 과도한 민족주의와 과거지향적 집착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지금 문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편견을 버리고, 균형 감각을 회복하며 미래 한국에 대한 비전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제 진보진영의 작은 미래보다 국가의 큰 미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념에 묶여있는 미래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하산의 첫발을 내디디며 문 대통령은 왜 우리가 이렇게도 극심하게 분열되었는지, 왜 대통령이 국민을 하나로 동이는 끈이 될 수 없었는지 심각하게 고뇌해보기 바란다. 이번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모든 사람, 심지어 촛불에 그을린 보수성향의 인물들까지 끌어안고 가기를 권한다. 새해 모든 국민이 문 대통령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운행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해 천동설을 신봉하던 중세 기독교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독일 철학자 엠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비견할 만한 인식론상의 대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이후 사고방식이나 견해가 종래와는 달리 크게 변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됐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전 산업자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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