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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터뷰] "어떤 국가도 재분배만으로 번영을 누린 사례는 없다"

바람아님 2020. 2. 15. 08:17

중앙일보 2020.02.14. 00:32

 

포퓰리즘은 반(反)엘리트주의
소수 엘리트 영향력 경계해야
일방적 노동자 보호는 역효과
세제·교육 등 다양하게 접근을
기업 자본투자 인센티브는 잘못
정부 주도 R&D 투자 늘어나야


세계 경제석학 2020 진단 ⑦ 대런 애스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

대런 애스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가 2018년 6월 캐나다고등연구원(CIFAR) 포럼에서 ‘로봇·인공지능(AI)과 일자리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 대런 애스모글루]

2020년은 전 세계 주요 선거가 몰려있는 ‘정치 대격변’의 해다. 국내에서는 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4월 치러지는 가운데, 11월 미국 대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연내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치를 예정이다. 홍콩은 민주화 시위가 지속하는 가운데 9월 입법회 선거에서 친중파와 민주파의 한판승이 벌어질 전망이다.


세계 경제도 중요한 분수령을 맞았다. 선거 결과에 따라 세계 경제가 ‘J(일본화) 공포’에서 벗어날지, 민족주의와 반(反)세계화 기조가 한층 더 강해질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가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기업과 노동자 모두 만족하는 공동의 번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중앙일보는 지난해 말 미국 케임브리지에서 대런 애스모글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과 교수를 만났다. ‘예비 노벨 경제학상’으로 이름 높은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은 애스모글루 교수는 경제 성장에서 ‘국가와 제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제학자다.


특히 애스모글루 교수는 한국 경제 성장의 예찬론자로 꼽힌다. 그는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2012)에서 한국과 북한이 동일한 역사를 가진 같은 민족인데도 경제 수준이 극명하게 다른 이유를 분석했다. 한국은 혁신을 보상해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 ‘포용적 체제’로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했지만, 북한은 착취적·억압적 체제로 쇠퇴했다는 설명이다.


Q : 주요 선거를 앞두고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활개 치고 있다.
A : “역사적으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중세 이탈리아의 민주주의 정부도 포퓰리즘에 정복된 적 있다. 포퓰리즘은 ‘반(反)엘리트주의’ ‘불만 있는 자들의 연합’이다. 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에 따르면, 대중은 귀족에게 더는 저항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한 사람에게 지지를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군주의 권력을 강화해 귀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대중은 소수의 엘리트가 정부를 장악했다는 생각이 들면 민주주의를 쉽게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Q : 지난 5년간 선진국과 신흥국 할 것 없이 포퓰리즘이 급부상한 이유는 뭔가.
A : “포퓰리즘 부상에는 세 가지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부의 불평등 강화로 소수 엘리트의 정치 영향력이 커졌을 때. 둘째, 대중이 정치권력을 무능하다고 느낄 때이다. 2008년 세계적 금융 위기, 이후 양적 완화(시중에 돈을 푸는 정책) 등 각국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구제책에도 민생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저금리 기조 장기화로 부채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민족주의 공약이 이기적이긴 해도, 실행 가능하다고 느껴질 때다. 미국의 경우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한다.”


Q : 미국은 주식 시장 호황이고, 50년 만에 최저 실업률을 기록하는 등 경제가 좋지 않나.
A : “그렇지 않다. 지금 미국 경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경제의 건전성을 보여주는 생산성 증가율이 역사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아울러, 중산층의 생활 수준을 나타내는 중위임금(median wage·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차례로 나열했을 때 정 가운데에 있는 임금)도 지난 40여년간 정체돼 있다. 불평등 지수는 높고, 시장의 힘은 지나칠 정도로 몇몇 회사에 집중됐다. 이는 미국 정치권의 잘못된 경제 정책 때문이다.”


Q : 어떤 경제 정책이 문제였나.
A : “미국 정치권에서는 수십년간 두 가지의 경제정책적 접근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논쟁만 키웠다. 공화당은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를 주장해왔다. 기업이 성장하면, 투자·고용·임금이 늘어난다는 논리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규제를 완화하고 기업 이익을 보호해도 생산성은 오르지 않았다. 노동자와 소비자의 희생으로 경영진 편에 서는 것은 주주를 위해 좋을지는 몰라도, 미국 중산층의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민주당은 부의 재분배에 집중해왔다. 최근에는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에 대한 논의도 뜨거웠다. 미국에 더 많은 인프라 투자, 나은 사회 안전망, 강력한 빈부 퇴치 조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어떤 국가·도시도 재분배 정책만으로 다 같이 번영을 누린 사례는 없다. 많은 사람이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북유럽 국가는 재분배로 공동 번영을 누렸다고 착각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Q : 북유럽 국가의 공동 번영 비결은 무엇인가.
A : “생산성 향상 정책과 노동자 협상력 강화로 고임금 일자리를 늘렸기 때문이다. 공동 번영에는 세 가지 축(pillar)이 있다. 첫째, 재정 재분배(fiscal redistribution)를 통해 부유층의 세금을 걷어 빈곤층을 위한 공공 서비스에 사용하는 것. 둘째, 법규와 노동자 보호 제도를 통해 고임금·고안정성 일자리의 공급이다. 좋은 일자리는 절대로 자유경쟁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지 않는다. 규제가 없는 한, 고용주는 저임금 일자리를 양산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셋째, 꾸준하게 생산성을 향상해 인구 전체적 임금 상승을 유도해야 한다. 생산성은 특정한 조건의 기술적 혁신이 필요하다. 생산 능력은 향상하되 노동자를 내쫓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특정 회사가 산업을 독점해서도 안 된다. 만약 A 회사의 기술이 뛰어나 B, C, D 등 수많은 회사를 파산으로 내몰면 사회 전체적으로 고용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Q : 세 번째 이유라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의 애플·아마존·페이스북 등 대형 정보기술(IT) 기업의 권력 남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건가.
A : “미국 기술 기업의 시장 집중도가 지나치고, 부패가 존재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노동자를 위해 강력한 보호 장치를 도입하고, 노동자가 경영에서 목소리를 내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워런 의원이 주장하는 내용은 불완전한 미봉책에 불과하다.”


Q : 어떤 점에서 불완전한가.
A : “미 연방 최저 시급(2019년 기준 7.25달러)이 18달러로 파격적으로 오르고, 노동자가 기업 이사회에서 한 자리씩 자리를 얻는다고 상상해봐라. 기업은 곧바로 자동화를 추진해 노동자의 수를 줄이려 들 것이다. 기계의 일자리 대체, 노동자 협상력 저하 등은 지난 20년간 국민소득에서 노동자의 비중이 현저히 떨어진 이유다. 결국 노동자 보호 규제만 늘리는 건 답이 아니다. 기술 개발도 ‘일자리 보호’라는 목표에 따라서 이뤄져야 한다.”


Q : 한국도 최저임금 인상, 52시간 근무제 등 노동자 보호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다.
A : “기술 강국인 한국은 미국보다 더 빠르게 자동화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고용주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노동자 보호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부의 불평등 해소가 목표라면 정책 입안자는 기술개발·노동규제·세제·교육 등 다양한 측면으로 접근해야 한다.”


Q : 자동화 기기의 발달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더 크다는 건가.
A : “자동화는 생산성 증대를 가속화할 수 있지만, 무분별한 자동화는 막아야 한다. 사실 지난 20년간 미 경제의 자동화가 급성장한 이면에는 미 정부의 실책(失策)이 있었다.”


Q : 어떤 정책이 문제였나.
A : “미 정부는 기업이 자본 투자를 늘릴 경우 보조금 지급, 세제 혜택을 준다. 이는 비뚤어진 결과를 낳았다. 인간보다 ‘덜 생산적’이더라도, 기계를 구입하면 상대적으로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고용할 경우 세금을 내야 하지만, 로봇을 구매하면 각종 세제 혜택을 챙길 수 있다. 결국 기업의 자본 투자에 강력한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이 문제의 원인이다.”


Q : 앞으로도 자동화·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등 기술의 발전은 계속될 텐데, 기업과 노동자의 공동번영을 위해 필요한 정책은 무엇인가.

A : “기술적 진보와 배치, 노동자의 협상력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시장을 움직여야 한다. 다행히도 이 두 가지 목표는 상호보완적이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 주도의 연구·개발(R&D) 투자가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지난 10년간 공공 R&D는 급격히 줄고, 민간 위주로 기술 개발이 이뤄졌는데, 민간 연구소는 기업의 이윤을 위해 자동화를 늘리는 데만 주력할 수밖에 없다. 컴퓨터·인터넷·항생제 등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고임금 일자리를 창출한 신기술 대부분은 미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앞으로도 새로운 기술·노동 패러다임을 구축할 공공 R&D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 자유는 독재와 무정부 사이의 취약한 ‘좁은 통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2012·사진)의 저자 애스모글루 교수는 지난해 말 신간으로 또다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신간 『좁은 통로(Narrow Corridor)』(2019)에서 21세기 시민사회에 필요한 자유와 의미를 분석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수석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이 책을 올해의 경제서 10권으로 꼽았다.

애스모글루 교수에게 책 제목의 의미를 물으니 “자유는 독재 정권과 무정부 사이에 위치한 아주 ‘좁은 통로’에 존재하는 취약한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자유는 헌법, 분산된 권력, 엘리트 정치가 아닌 ‘사회 계층 간 이동’에서 나온다”며 최근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시위가 확산된 이유를 설명했다. 파리·산티아고 등에서 시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엘리트 지배층이 경제적 이득을 독차지했다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각국 정치·복지기구·노동기관이 급속도로 세계화된 경제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사회 계층 간 이동’은 더욱 어려워졌다.


애스모글루 교수는 “2008년 금융위기는 경제적 피해를 넘어 정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며 “미국·유럽 등 선진국뿐 아니라 신흥국에서도 이미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케임브리지(미국)=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