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동서남북] '다 그렇지 뭐'라는 무력감

바람아님 2020. 3. 3. 08:42

(조선일보 2020.03.03 박돈규 주말뉴스부 차장)


좌절과 분노가 배어 있는 말… 운이 좋아야 마스크 구해
구호만 있고 내용은 없는 정부… 국민의 한숨 흘려듣지 마라


박돈규 주말뉴스부 차장박돈규 주말뉴스부 차장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다. 알람이 울리면 머리맡을 휘저어 스마트폰부터 찾는다. 오전 7시.

누운 채로 밤중에 일어난 뉴스를 체크하고 오늘의 날씨와 일정을 훑는다.

새로 생긴 습관이 하나 더 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국내 현황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전염병은 타인과 나의 사회적 관계를 다시 가늠케 해준다.

어지간하면 경조사도 불참하는데 지난 일요일에 사촌 동생 결혼식이 있었다. 식장은 집에서 165㎞ 떨어진 소도시.

미세 먼지는 '보통'이었으나 기분은 보통이 아니었다. 외출하며 코와 입을 가렸다.

마스크 냄새에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거리에선 햇볕이 드는 쪽으로, 행인과 거리를 두고 걸었다.


'다 그렇지 뭐….' 무심코 내뱉는 이 말에 가슴이 철렁할 수 있다는 걸 며칠 전에야 알았다.

여동생에게 카톡으로 '그곳은 무사하니?' 물었는데 '집에 마스크가 없다'며 '다 그렇지 뭐'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약국에는 품절(品切)이고 인터넷으로 겨우 주문한 마스크는 배송이 더뎌 면마스크를 쓰고 다닌다고 했다.

'다 그렇지 뭐'에는 한숨과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 동네 약국을 돌며 마스크를 긁어모아 소포로 부쳤다.


결혼식장에는 하객이 단출했다.

마스크를 쓴 채 눈빛으로 서로 안부를 물었다. 악수 대신 주먹 인사를 나눴다.

시국이 시국이라 신랑·신부도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속이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

코리아 포비아'로 이날 터키가 한국인 입국을 불허하면서 신혼여행도 취소됐다.


마스크는 요즘 한국에서 웃돈을 줘도 구하기 어려운 생필품이다.

결혼식장에서도 각자 마스크를 어떻게 구했는지가 화제였다.

정부가 대량 공급을 발표한 뒤에도 몇 시간씩 줄을 서야 1인당 5장까지 살 수 있는데,

그마저도 금방 동나 빈손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많다. 허탕치지 않으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석기시대에는 사냥을 나갔다. 같은 노력을 해도 운이 좋아야 포식했고 운이 나쁘면 굶주렸다.

이 나라에서는 최근 열흘간 '마스크 사냥'이 그런 꼴이었다. 거죽만 현대사회지 석기시대와 같았다.


나라를 석기시대로 끌고간 책임은 정부에 있다.

국민 안전이 외교보다 우선하는데, 한국 정부는 '운명 공동체'라며 중국에 문을 걸어잠그지 않았다.

"(코로나19가)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이에 마스크는 막대한 물량이 중국으로 건너갔고

코로나 사태는 통제 불능으로 점점 악화됐다.

신천지라는 종교 집단에 흙발로 쳐들어가 희생양 삼는다고 정부의 알리바이가 증명되나?


재난 컨트롤타워가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너나없이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의료진과 봉사자의 분투와 고귀한 희생에 감사하면서도 사태를 키운 무능에는 화가 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중이다.

이 정부는 구호만 있고 내용이 없다. '다 그렇지 뭐'는 이런 낭패감이 쌓여 나오는 웅얼거림이다.


물량이 충분하다는 마스크가 왜 품절인지, 우리 곳간이 비었는데 왜 중국에 보내는지,

일회용품이 어쩌다 일상을 쥐락펴락하는지 국민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젠 중국을 비롯해 80여국이 한국인 입국을 금지하거나 검역을 강화했다.


확진자 급증은 한국의 앞선 진단 기술 덕이라는 '정신 승리'는 경계해야 한다.

잠시 시선을 거둘 순 있겠지만 참담한 현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이 대중화되고 장비가 좋아지면서 암 진단이 늘어났지만 그렇다고 암을 정복한 것은 아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병실이 없어 집에서 대기하다 숨지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정권은 국민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쪽배다.

'다 그렇지 뭐'를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한숨이 모여 태풍이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02/20200302040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