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신용호의 시선] 루스벨트의 뉴딜, 문재인의 뉴딜

바람아님 2020. 5. 9. 08:27

중앙일보 2020.05.08. 00:29

 

뉴딜은 미 진보 30년 집권 동력
코로나 사태, '문재인 뉴딜' 불러
보수, 처절하게 혁신 후 경쟁해야
신용호 논설위원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민주당 집권은 운이었다. 대공황을 초래한 공화당에 대한 응징이 민주당 집권을 가능케 했다. 대통령에 네 번이나 당선된 루스벨트는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정치를 다시 썼다. 바로 뉴딜을 통해서다. 뉴딜은 진보 30년 집권의 바탕이었다.


미국 정치학자 크리스티 앤더슨의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후마니타스)에는 루스벨트가 다수파를 형성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번역은 민주당 이철희 의원이 했다. 지난해 말 이 책을 읽은 후 진보 대통령에 대한 제언 삼아 칼럼을 써볼까 하는 궁리를 했었다. 그러다 그만뒀다. 루스벨트 방식을 소화하기엔 당시 문 대통령의 상황과 처지가 만만찮아 보여서였다. 다시 쓸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총선이 모든 걸 바꿔놨다. 말해줄 것도 없이 여권에서 뉴딜 얘기가 벌써 나왔다. 문 대통령이 얼마 전 “경제 전시 상황에 한국판 뉴딜을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한다”고 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21대 국회 최우선 과제로 ‘한국판 뉴딜’을 꼽고 있다. 진정 진보가 집권 30년을 꿈꾸는 건가.


다수파를 노린 루스벨트의 전략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책을 읽으면 뉴딜에 대한 오해 하나가 풀린다. 뉴딜을 흔히 공공근로를 통한 대규모 공익·토목사업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뉴딜은 그 정도의 개념이 아니다. 국가 정책의 대전환이자 진보세력 연합을 위한 정치 전략이 뉴딜이다.


루스벨트는 32년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미국 시민들을 위한 뉴딜을 약속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이 나라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개혁에 승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라고 한다. 뉴딜을 통해 국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대접하겠다고 약속한 거다. 그 당시 벌써 국민=주권자 개념을 내놓았다. 공화당 정부는 기업이 먼저였고 국민은 뒷전이었다. 정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 당시로선 엄청난 일이다.


루스벨트는 정책으로 새 지지층을 형성시켰다. 뉴딜 정책은 빈곤층 구호 사업, 재정 지출을 통한 경기 회복, 시장 개혁 등 세 가지가 큰 토대다. 구호 사업과 경기 회복을 위해 돈을 풀었다. 은퇴자·장애인에게 연금을 주고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했다. 노동과 복지를 키워드로 사회를 바꿔 나갔다. 미국에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도입된 것이다. 루스벨트는 36년 대선과 의회 선거에서 압승한다. 확실한 다수파가 된다. 노동자·농민과 빈곤층을 제대로 공략했고 이민자의 호응도 끌어냈다. 뉴딜 정책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뉴딜 다수파 연합’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진보는 반기업으로까지 가진 않았다. 다수파가 되기 위해선 재계의 마음도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난롯가에서 나누는 정다운 대화처럼 풀어낸 ‘라디오 연설’ 등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루스벨트의 리더십도 뉴딜 성공이 주요한 열쇠였을 거다.


시대와 여건이 다르지만 공교롭게 당시를 연상시키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진보의 총선 압승에 이어 앞으로 닥쳐올 코로나 경제 상황이 ‘문재인 뉴딜’을 부르고 있는 거다. 총선 전이었다면 포퓰리즘 논란에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하지만 코로나로 전 국민에게 돈을 푸는 일도 이제 어색하지 않다. ‘경제 전시 상황’이라지 않나. 문 대통령이 대공황의 루스벨트처럼 ‘문재인식 뉴딜 정책’을 줄줄이 꺼내 든다면 보수 지지층을 더 흔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문 대통령의 롤 모델이 루스벨트다. 당장 민주당에선 ‘전 국민 고용보험제’ 도입이 거론되는 판이다. 진보는 확장 재정을 통해 사회경제적 질서 자체를 그들의 방향으로 재편하려 할 거다. 그건 대선 전략과도 직결될 게 분명하다.


상황이 이 정도면 보수 정당에 비상이 걸려도 모자랄 판이다. 근데 아직 체제정비조차 못 해 우왕좌왕하는 중이다. 보수는 과연 진보의 질주를 제지할 수 있을까. 보수가 루스벨트 시절에는 사사건건 반대로 일관하다 나락에 빠졌다. 반대하다 선거에 졌는데도 더 세게 반대했다. 오늘 원내대표를 새로 뽑는 통합당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가 중요하다.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과거 미국의 보수처럼 반대로 일관하진 않겠지만,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인 건 분명하다. 코로나 뉴노멀 시대에 통합당은 어떤 정체성으로 심판받을지 말이다. 미래는 진보냐 보수냐 싸움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그보다는 누가 미래로 가는 세력이냐 유능 하느냐로 평가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준에서 현재는 보수가 진보보다 그리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더 절박해져야 한다. 그동안의 보수는 버리고 진보보다 더 처절하게 혁신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신용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