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을 전부 버리고 원시의 삶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어서 자기부상열차나 영상통화처럼 선택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의 특징은 감정을 전혀 억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피 냄새가 물씬 나는 이 유토피아 소설은 미국 작가 칼렌바크가 1975년에 쓴 작품이다.
행복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주체에게 있어 그 요구가 충족된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각자의 특수한 성격과 의욕과 자의에 적합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그 현실존재 속에서 자기 자신을 향유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며[『역사철학』 12. 4], 따라서 그 의욕과 그 주체가 어떠한 것인가에 따라서 다양한 행복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행복 가운데서 인간 행위의 최고의 가치기준과 궁극의 목적을 인정하고 도덕을 이것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보는 입장이 바로 행복주의(Eudämonismus) 및 행복설(Glückseligkeitslehre)이다.
그것은 행복의 개념이 다의적인 것에 대응하여 다의적이다.
헤겔에 따르면 "칸트 철학 이전에 도덕은 행복설이며, 행복이라는 규정 위에 세워져 있었다"[『철학사』 18. 186].
이러한 도덕설로서의 행복설을 행복이 경험적 개념이며 도덕의 원리일 수 없다고 하여 부정한 것이 칸트이다.
헤겔도 행복주의를 그것이 일상적 현실 속에서의 경험적 행복과 감각의 향유만을 가리키는 한에서는 부정하지만
[『신앙과 지식』 2. 292f.], 전체로서는 긍정한다. 왜냐하면 헤겔은 행복을 칸트처럼 단순한 욕망과 경향성의 충족이라든가
도덕과 구별되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에서의 조화에 관계되는 적극적인 것으로서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헤겔에서는 도덕적 의식과 행복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행복의 조화가 요청된다"[『정신현상학』 3. 444].
여기서 조화가 '요청'되는 것은 행복이 자기의식의 생성이라는 모습에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즉 행복이란 직접적으로는 행위 그 자체 가운데서의 "정신의 현실과 대상적인 실재와의 통일"[3. 268]이지만, 그 통일은
즉자적으로는 이미 완성되어 현실적으로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매개로 하여 생성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목적을 수행하는 것, 따라서 또한 자기를 실현하여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대상적으로 직관하는 것,
즉 자기를 향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행복인 것이다.
나아가 행복이 자아의 생성에 관계하는 이상, 그것이 실제로 얻어지는지 아닌지, 그리고 위에서 말한 통일과 조화가 얻어지는지
어떤지 하는 것은 우연적이며, 따라서 행복이라는 것에는 행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반해 '지복(至福, Seligkeit)'에는
이와 같은 우연적인 것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지복이란 오로지 신에 대해서만 말해질 수 있을 뿐이다[『뉘른베르크 저작집』 4. 231].
[네이버 지식백과] 행복(행복설) [幸福(幸福說), Eudämonie, Glück(Eudämonismus, Glückseligkeitslehre)]
(헤겔사전, 2009.1.8, 도서출판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