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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구정'은 어떻게 다시 '설날'이 되었나?

바람아님 2015. 2. 17. 11:01

SBS 2015-2-16

 

설 연휴가 시작됩니다. 다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계시나요? 올해는 설날이 목요일이어서 많은 분들이 5일 연휴를 즐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기자들은 휴일에도 뉴스가 있기 때문에, 연휴 중에도 다들 하루 이틀은 근무를 합니다. 저도 설 전날과 토요일 이틀 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설을 앞두고 제 출입처인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에서 보도 자료를 냈습니다. 제목은 "되찾은 설날, 공휴일 된 지 30년!"이네요. 지난 1985년 음력 설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지 30년을 기념해 관련 기록물을 홈페이지(www.archives.go.kr)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저도 과거 '구정' 또는 '민속의 날'로 불리던 설날이 어떻게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터라, 그 우여곡절을 이번에 나온 자료와 함께 정리해서 소개할까 합니다.

음력 1월 1일인 설날이 양력 1월 1일에게 공식적인 '설날'을 내주게 된 것은 을미개혁이 이뤄진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양력을 사용하면서 1896년 1월 1일을 '설날'로 지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한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설날'이기에 일반인들은 양력설에 대해 강한 이질감을 느끼며 여전히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여기고, 조상에 제사를 드리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습니다.

일제 시기가 되자 일본 총독부는 음력설 쇠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층 압력을 가합니다. 공권력으로 억압한 것은 물론 물리력까지 행사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음력 설날에 각 관청과 학교의 조퇴를 엄금하거나 흰 옷을 입고 세배 다니는 사람에게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아 얼룩지게 하는 등 갖가지 박해를 가했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신정(新正)이 낯선데다 일제가 강요까지 하니, 서민들 입장에서는 신정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신정을 '왜놈 설'이라고까지 부르며 저항하고, 음력설을 쇱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에게 양력설을 강요했던 일본은 어떻게 설을 쇨까요? 일본은 우리와 달리 양력설을 쇱니다. 일본은 태양력을 채택한 1873년 이후 설날은 양력 1월 1일입니다. 양력 1월 1일을 전후해 보통 일주일 정도를 쉬지만, 일본에서 음력설은 아무날도 아닙니다. 우리와 달리 비교적 큰 저항 없이 양력설을 받아들였고, 이제는 완전히 정착이 된 것이죠. 저는 특파원 근무 기간을 포함해 일본에서 있던 4년 동안 네 번의 설날을 보냈는데, 그때마다 평일과 다름없는 일본 음력 설날의 풍경이 저에게 조금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음력설 억제정책은 광복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정부는 1949년 공식적으로 양력설만을 공휴일로 지정합니다. 사진 1이 당시의 문서입니다. 故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제 124호로 양력설만을 공휴일로 지정합니다. 당시 정부가 내건 명목은 '이중과세(二重過歲)', 즉 양력과 음력으로 두 번의 설을 쇠는 것을 방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음력설을 폐습적인 이중과세로 간주하고 시간소비와 물자낭비의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정부는 이른바 '신정단일과세(新正單一過歲)' 정책을 이후에도 강하게 펼칩니다. 당시 정부의 인식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사진 2의 1981년 12월 16일자'신정단일과세의 정착화를 위한 지시'라는 국무총리 지시사항입니다. 모든 공직자들은 구정과세를 절대로 하지 말고, 구정 관련 행정지원을 가급적 하지 않도록 할 것 등 6가지의 지시사항이 담겨있습니다. 또 신정 귀성열차 요금의 할인, 재소자나 군인에 대한 떡국 등의 구정 특식 제공 지양, 신정에 맞춘 시중자금 집중 공급 등 정부 부처별로 행정대책을 수립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정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정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지요.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음력설을 쇠려고 했고, 고향으로 가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시골이 고향인 저도 어렸을 때 설날은 항상 음력설을 쇠었지, 신정을 설날로 여겼던 기억은 없습니다. 설이 공휴일은 아니었지만, 일부 공무원들만 빼고는 대부분 친척들이 음력설에 고향에 모여 정겹게 설을 보냈습니다. 어렸을 때 신정을 강요하는 정부 정책에 어른들이 불만의 목소리를 종종 냈던 것도 기억납니다. 저도 어린 마음에 설날이 방학 때가 아니면 마음 편하게 못 쉰다는 점 때문에 정부의 정책을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정부는 국민들의 저항(?)에 손을 들었습니다. 정치권이 국민정서를 감안해 총선에서 음력설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정부는 1985년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의 공휴일로 지정합니다. 어색하게 들리는'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경위도 사진3의 국가기록원 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1985년 1월 15일 공식적인 첫 설날 지정에 앞서 차관회의가 열렸는데, 집권여당에서는 '조상의 날'로 요청을 했다는군요. 그러나 차관회의에서는 부정적 견해들이 다수였고, '민속의 날','영춘절'등 다양한 명칭이 거론됐다고 합니다. 결국 명칭 결정은 국무회의로 넘겨졌고, 1월 18일 국무회의에서 원안 '조상의 날'은 '민속의 날'로 수정 의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설날'이 아닌 '민속의 날'이라는 이상한 명칭에다 단 하루만 공휴일로 지정된데 대해 '반쪽 설'이라며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자, 결국 1989년에 이르러'설날'이라는 이름을 온전히 되찾게 됩니다. 공휴일도 설날 전날과 설날, 설날 다음날 3일로 확대됐습니다. 사진 4가 이 개정안 내용에 대한 1989년 1월 26일 국무회의 서류입니다. 지금과 같은 '3일 공휴일 설날'이 정착되기까지 참 사연도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린 셈이지요.

'구정'(舊正)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없어진 지 올해로 30년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정'이라는 명칭이 입에 남아있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 구정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부침(浮沈)의 역사를 지닌 우리의 설날, 올해는 사연을 알고 나니 왠지 마음이 짠해져서 조금 더 애착이 가는 것 같습니다. 설날이라는 이름도 더 정감 있게 들립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비슷한 느낌이 드시나요?


유영수 기자youpeck@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