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세상이야기

[단독] 예린이는 2㎝ 집에 갇혀 있다

바람아님 2015. 12. 25. 00:18

[중앙일보] 입력 2015.12.24 


수년간 가정학대 … 11세 16kg 여자아이 그림에 담긴 상처


‘나영이 주치의’ 신의진 면담
A4 종이에 집 조그맣게 그려
지속적 학대로 심리적 위축
“이 집에 고양이랑 살아요”
엄마·아빠, 가족 개념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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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한 예린(가명·11)이가 지난 22일 인천의 한 병원에서 그린 그림. 예린이는 검은색 볼펜으로 A4용지 왼편에 이층집을 조그맣게 그렸다. 가로 2㎝, 세로 3㎝ 크기다. 굴뚝 위엔 연기 대신 꽃송이 2개를 그렸다. [임현동 기자]


“우리 그림 한번 그려볼까?”

 지난 22일 인천시 동춘동의 A병원. 잠시 고민하던 예린(가명·11)이가 검은색 볼펜을 집어들었다. 앙상했던 손목은 최근 수액 치료 등을 받고 난 뒤 퉁퉁 부어 있었다. ‘나영이 주치의’로 알려진 소아정신과 전문의 출신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이 예린이에게 A4용지를 건넸다.

 예린이가 종이 한쪽에 맨 처음 그린 건 작은 크리스마스트리였다. 또래의 아이들이 보통 종이의 절반 이상을 채워 큼직한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달리 예린이는 엄지손가락만 한 트리를 열심히 그렸다. 나무엔 빽빽하게 꽃·하트·리본 등 장식품을 그려넣었고 꼭대기엔 별을 그렸다. 트리 아래엔 네 갈래로 뻗은 뿌리를 강조해 그려넣었다.

 “하트랑 리본을 더 그리고 싶은데…. 나무가 작아서 못 그렸어요.”

 신 의원은 “종이 구석에 작은 그림을 그린다는 건 지속적인 학대로 인해 압박을 당한 심리 상태와 정서적인 폭이 제한돼 작은 공간에 갇혀버린 마음이 표현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장식을 여러 개 그린 건 마음의 공허함과 애정 결핍이 드러난 것이고, 뿌리를 강조한 것은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불안감과 아픔이 하루빨리 안정되길 바라는 의미”라고 했다.

 예린이는 인천시 연수구의 한 빌라에서 친부 A씨(32)와 동거녀로부터 감금· 폭행 등 수년간 학대를 받았다. 손과 발이 노끈에 묶인 채 세탁실에 갇혀 있다가 지난 12일 가스 배관을 타고 탈출해 구조됐다. 당시 키 1m20㎝에 몸무게 16㎏. 만 11세 아동(여아 평균 키 1m39.9㎝, 몸무게 39.2㎏)의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야위어 있었다. 예린이의 그림에는 몸에 난 상처보다 더 깊고 아픈, 학대에 의해 아로새겨진 마음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무를 다 그린 예린이가 두 번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문과 창문 4개가 달린 이층집이었다. 트리 그림처럼 가로 2㎝, 세로 3㎝ 크기의 작은 집이었다.

 “이 집에 가족은 누가 살아?”

 “가족은 없어요. 귀여운 고양이 3마리랑 같이 살아요.”

 “집에서 함께 놀이를 할 친구는 누가 있을까?”

 “친구도 없어요.”

 신 의원은 “친부로부터 당한 지속적인 학대로 인해 부모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고 가족 간의 사랑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림을 다 그린 예린이가 뭔가를 잊은 듯 다시 볼펜을 집어들더니 지붕 위에 작은 굴뚝을 추가로 그렸다. 굴뚝 위엔 피어나는 연기 대신 꽃송이 2개를 그려넣었다.

 “무서운 회색 연기보다는 예쁜 꽃이 좋아요. 우리 집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향기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장기결석 초등생 전수조사=보건복지부와 교육부는 초등학교 장기결석 아동에 대한 전수조사를 내년 1월까지 완료할 방침이라고 23일 밝혔다. 결석 사유가 불분명한 가정에는 학교 교직원 등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할 계획이다.

글=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