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정동식의 유럽 리포트]'투자냐, 스파이냐' 중국자본에 벌벌 떠는 유럽

바람아님 2016. 10. 9. 23:51
경향신문 2016.10.09. 10:06

한국전력에 중국이 대규모 투자를 한다면? 벨기에의 한 에너지기업에 중국이 1조원 넘는 돈을 투자하기로 했다가 성사 직전에 뒤집혔다. 문제의 기업은 벨기에 북부의 전력과 천연가스 공급을 전담하는 공기업 이안디스(Eandis). 이 회사는 재정난을 해소하고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2년 전부터 투자자를 물색해 왔다. 그중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중국국가전망공사(SGCC)로부터 830만유로(약 1조1000억원)의 투자를 받고 지분 14%를 주기로 했다고 지난 6월 발표했다.

중국 국영기업에 지분 일부를 매각하려다 반대여론에 밀려 계약을 포기한 벨기에의 에너지 공급회사 이안디스. | 더모르헌
중국 국영기업에 지분 일부를 매각하려다 반대여론에 밀려 계약을 포기한 벨기에의 에너지 공급회사 이안디스. | 더모르헌

이 회사의 주주는 지자체 239곳이다. 이 제안이 최종 확정되려면 지자체들의 절반 이상과 지분 75%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중국이 제안한 액수가 2위 제안자보다도 거의 2배에 달하는 거액이어서 계약은 확정적인 듯했다. 지난달 하순까지만 해도 지자체의 70% 이상이 찬성을 결의했다.


그런데 최종 결정일(10월3일)을 1주일 앞두고 사달이 났다. 익명의 편지 한 통이 벨기에의 장관들과 언론에 배달됐다. 내용은 국가기간망인 에너지업체에 중국 자본이 들어오면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해가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작성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보기관 관계자로 추정됐다. 투자자가 중국 국영기업이어서 공산당-중국군-중국정보기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스파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후 벨기에 언론은 찬반 공방에 빠져들었다. “겨우 14%의 지분으로 국가안보에 무슨 위험이 있겠느냐” “중국이 그리도 무서운가”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반대 여론이 훨씬 우세했다. 벨기에 정보기관 수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비즈니스에는 국가안보상의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브뤼셀자유대학(VUB)의 한 교수는 “에너지공급 같은 전략분야에서는 14%의 지분이라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서 “놀라울 정도로 나쁜 거래”라고 비난했다. 신문들은 ‘트로이 목마’에 비유했고, 중국의 위협을 의미하는 ‘황화’(黃禍)를 갖다붙이기도 했다.


영국이 곡절 끝에 중국 자본의 투자를 승인한 힝클리포인트 원전. | 연합뉴스
영국이 곡절 끝에 중국 자본의 투자를 승인한 힝클리포인트 원전. | 연합뉴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본부에 근무하는 한 현역 대령은 실명으로 신문에 칼럼을 기고, “중국은 서방세계의 주요 기간산업 인프라와 보안시스템을 손에 넣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의 에너지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사이버 세계를 지배하려는 게 중국군의 독트린”이라면서 “이는 상대국가의 지휘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지분 7%를 가진 제2의 도시 안트베르펜 의회는 주총 나흘 전에 반대를 결정했고, 결국 거래는 결국 무산됐다. 안트베르펜 부시장은 부결 후 벨기에 주재 중국대사를 찾아가 사과하기도 했다. 안트베르펜은 이미 중국과의 교역과 투자가 많은 도시여서 혹시 이번 일로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호주의 배전망 사업체인 오스그리드도 중국 국영기업 투자를 받으려다 안보위협론에 막혀 포기했다. | 연합뉴스
호주의 배전망 사업체인 오스그리드도 중국 국영기업 투자를 받으려다 안보위협론에 막혀 포기했다. | 연합뉴스

중국 자본에 대한 공포는 벨기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도 26조원이 넘게 드는 힝클리포인트 원전건설에 중국 자본을 33% 투자받기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시절 합의했으나 지난 7월 취임한 테레사 메이 총리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계약 체결 하루 전날 승인을 보류했다. 메이는 브렉시트 이후 더욱 중요해진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원전의 소유 주체가 바뀌지 않도록 하는 등 안보 강화 조치들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지난달 계약을 최종 승인하는 곡절을 겪었다. 8월에는 호주 배전망 사업체인 오스그리드 매각에 중국 SGCC가 10조원 넘는 액수를 제안했지만 안보위협론에 막혀 결렬됐다.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세계를 공략하는 중국, 투자 유치와 일자리 창출에 목말라 하면서도 중국의 팽창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각국의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브뤼셀 | 정동식 통신원(전 경향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