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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25] 도버

바람아님 2013. 12. 10. 10:00

(출처-조선일보 2011.08.26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영국 동남부의 항구 도시 도버(Dover)를 찾아갔다. 올여름에는 유럽에도 어지간히 비가 잦았지만 다행히 이날은 현지 사람이 특이한 악센트로 '노 라인 굿 다이(norain, goodday, 비 안 오는 좋은 날)'라고 이야기하듯 화창하게 맑았다. 그 때문에 눈부시게 하얀 백악질 절벽(WhiteCliffs)이 파란 바다에 바로 떨어지는 이 지역의 특이한 풍경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영국을 고어(古語)로 알비온(Albion, '하얀 나라')이라 칭한 이유도 대륙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바라보는 하얀 절벽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프랑스군과 전쟁이 벌어지고 정신 나간 늙은 왕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이 지역을 무대로 한 일이다. 절벽 위에서 동쪽을 보니 바다 건너 프랑스 땅 칼레(Calais)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두 지역 사이가 34km로 아주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빤히 보일 정도인지는 미처 몰랐었다.

큰 섬과 대륙이 짧은 해협으로 나뉘어 있다는 지리적 요인은 유럽 역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이 바다를 건너는 일이 때로는 성공을 거두고 때로는 좌절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역사의 흐름을 좌우한 것이다. 로마제국은 영불해협을 건너는 데 성공하여 한때 스코틀랜드 변경 지역까지 판도를 넓힐 수 있었다. 노르망디 백작 역시 군대를 이끌고 이 바다를 넘어 들어가서 노르만 왕조를 세움으로써 잉글랜드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반면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로 알려진 당대 유럽 최강의 해군을 동원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을 징치하겠다고 나섰지만 엉성한 지휘와 악천후로 인해 전 함대가 사실상 궤멸되어 국운이 쇠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폴레옹 역시 유럽 대륙을 거의 전부 지배했지만 영국을 점령하지 못해 파멸이 시작되었다. 히틀러의 강력한 전차부대도 네덜란드-벨기에까지 거침없이 진격했지만 도버 앞바다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이 작은 바다를 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을까?

나폴레옹은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중에는 당시 등장한 열기구를 이용해 병사를 실어 나르겠다는 '공수부대' 방안도 있었고, 땅굴을 파서 해협을 넘겠다는 방안도 있었다. 나폴레옹의 그 무모한 땅굴 계획은 200년이 지나서야 런던과 파리를 잇는 해저 열차 터널로 현실화되었다. 역시나 역사의 현장에 가보니 책에서 읽은 것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