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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27] 천연두

바람아님 2013. 12. 12. 09:46

(출처-조선일보 2011.09.09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1521년, 코르테스는 고작 수백 명의 스페인 병사와 지역 주민 동맹군을 지휘하여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오늘날의 멕시코시티)에 대한 최후 공격을 시도했다. 수개월에 걸친 포위와 전투 끝에 마침내 수도가 함락되었을 때 아스텍 황제 몬테수마와 그의 계승자를 비롯하여 주민의 절반이 죽었다. 운하는 시체들로 가득찼다. 시내로 진격해 들어간 코르테스는 "시체를 밟지 않고는 발을 디딜 수도 없다"고 썼다. 사실 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침략자들의 군사 공격이 아니라 천연두였다. 유럽인들이 아스텍 제국에 근접했을 때 이들보다 먼저 병원균이 시내로 들어가서 심각한 전염병이 창궐했던 것이다.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들여온 각종 병균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구대륙과 신대륙은 만 년 이상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세균의 종류도 다를 수밖에 없고, 당연히 사람들의 면역 체계도 다르게 진화해 왔다. 천연두는 여러 차례 유럽 대륙에서 크게 유행했지만 16세기에는 안정 단계에 들어가서 일종의 풍토병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대륙 주민들에게 천연두균은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낯선 병균이었다. 당시 병의 양태도 극심하여,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름집이 잡혀 움직일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갔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곰보자국이 나거나 맹인이 되었다. 특히 발병할 때까지 잠복기가 10~14일이나 되는 이 병의 특징 때문에, 실제 감염되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는 환자가 스스로 멀리 피난가면서 병을 퍼뜨렸다. 이로 인해 남북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이 병이 급속히 퍼진 것이다. 의학사가(醫學史家)들의 추정으로는 당시 멕시코에서 천연두로 사망한 사람이 1800만명에 달한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16세기 중 천연두 사망자가 8000만명에서 1억명 사이라고 한다. 당시 세계 인구가 약 5억명으로 추산되므로 거칠게 표현하면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이 병으로 사망한 셈이다. 분명 천연두는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병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를 완전히 박멸된 병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더 위험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 병균에 대한 면역체계를 잃어가는 상태에서 만일 특정 국가 혹은 테러 집단이 천연두균을 생물학전 무기로 사용한다면 정말로 가공할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만반의 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