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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97] 유난히도 긴 겨울

바람아님 2013. 12. 13. 11:52

(출처-조선일보 2011.02.07.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설날 다음 날인 지난 2월 4일이 입춘이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더니 요 며칠 동안에는 희미하게나마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다. 창문 가득 내 방을 들여다보며 서 있는 목련 나무 꽃봉오리도 한결 도톰해진 것 같다. 하지만 마당 한편에 지난해에 내린 눈이 여전히 녹지 않고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동장군이 우리를 그리 쉽사리 놓아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이번 겨울은 왜 이리도 길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어쩌면 우리가 운전을 할 때 가는 길보다 오는 길을 훨씬 짧게 느끼는 이치와 흡사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목적지를 향해 갈 때보다 돌아올 때 훨씬 짧다고 느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번 설 연휴에도 귀성길과 귀경길이 다르게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이런 차이는 초행길이나 자주 다니지 않는 길의 경우에 특별히 두드러진다.

가고 오는 길의 실제 거리가 서로 다를 리 없지만 돌아오는 길은 적어도 한 번은 달려본 길인 만큼 조금이라도 더 익숙하여 빨리 달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프랑스 심리학자의 실험에 의하면 실제로 차이가 나는 게 아니라 우리 뇌가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란다. 파리 시민에게 파리의 거리 사진을 보여주며 그들이 느끼는 시간의 길이를 측정한 결과, 사람들이 본 사진의 수와 그들이 느끼는 시간의 길이가 비례하는 걸로 나타났다. 가령 1분에 서른 장의 사진을 본 사람들이 같은 시간 동안 열 장을 본 사람들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났다고 느낀 것이다. 목적지를 향해 운전을 할 때 우리 뇌는 마음속에 지도를 만들기 위해 주변 풍경에 대해 되도록 많은 정보 사진을 찍느라 바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 덜 분주하다.

이번 겨울이 예년의 겨울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그저 한 사나흘 춥다간 풀리던 날씨가 이번에는 호되게 추운 날들이 지겹도록 길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이번 겨울을 유난히도 길게 느끼도록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한반도의 겨울은 최근 점점 짧아지고 있다. 그러니 이장희 시인이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읊은 것처럼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 날도 그리 머지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