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7) “소수를 위한 예술은 안 된다”…민중 위한 예술 추구

바람아님 2019. 4. 13. 08:04
[중앙선데이] 2019.03.30 00:21

“예술은 대다수의 삶에 도움돼야”
구체적 삶과 유리된 ‘살롱예술’ 비판

근대건축 효시 ‘국제주의 양식’ 설계
네모반듯한 건물, 삼일빌딩도 해당

‘예술가=천재’ 예술 지상주의 거부
독일 낭만주의 넘어서는 새 이정표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7>
그로피우스가 1911년 설계한 파구스 공장. ‘국제주의 양식’건축의 효시로 여겨진다.

그로피우스가 1911년 설계한 파구스 공장. ‘국제주의 양식’건축의 효시로 여겨진다.


1914년 독일공작연맹 쾰른 전시회에서의 ‘표준화 논쟁’ 당시 그로피우스는 30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에 비해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1911년, 그로피우스가 페터 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서 독립해 처음 설계한 ‘파구스 공장(Fagus-Werk)’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건물이었다. 이 공장은 훗날 ‘국제주의 양식(International Stil)’이라 불리는 근대건축의 효시로 여겨진다. ‘국제주의 양식’이란 철골 구조에 유리와 콘크리트로 건설된 기능주의적 미니멀리즘 건축을 지칭한다. 바우하우스의 3대 교장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미국으로 건너가 건설한 수많은 ‘미국식’ 네모반듯한 건물들이 바로 ‘국제주의 양식’ 이다. 우리나라의 삼일빌딩도 여기 해당한다. 건축가 김중업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뉴욕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을 그대로 모방해 설계했다. (‘김중업의 모방’을 비판할 이유는 전혀 없다. 모방이 있어야 창조적 편집도 가능하다).
 
‘표준화 논쟁’에서 그로피우스는 예술가의 자유와 상상력을 강조하는 반 데 벨데의 편에 선다. 훗날 반 데 벨데가 바이마르 공예학교 교장에 그로피우스를 추천한 것도 이 때의 인연 때문이다.
 
그러나 쾰른 전시회에 그로피우스가 출품한 ‘모델공장(Musterfabrik)’과 ‘열차 실내 인테리어’의 내용은 반 데 벨데의 입장과는 많이 달랐다. ‘효율성’ ‘기능성’ ‘대량생산’ 같은, 시대정신을 적극 추구하는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반 데 벨데 편에 선다. 무테지우스의 ‘표준화’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무테지우스의 ‘애국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천재의 영역’ 예술교육 가능한가
 
하지만 ‘애국주의’ ‘국가주의’에 대한 그로피우스의 태도 또한 많이 애매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경기병 연대의 장교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몇 달 지나지 않은 1914년 10월 21일에는 무공을 인정받아 ‘철십자 훈장’까지 받는다. 전쟁 이후 보여준 아방가르드적 활동을 고려하면 사뭇 낯선 모습이다.
 
무테지우스의 ‘표준화’는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봉사의 대상이 ‘국가의 경쟁력’이든 ‘인민의 삶’이든, 현실과 무관한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의미 없다는 주장이다. 그로피우스에게 예술이란 ‘인민을 위한 예술’, 즉 ‘인민의 구체적 삶에 실용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예술’이어야 했다. 내용적으로 반 데 벨데 편은 결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은 전쟁 후, 그가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1880~1938), 아돌프 베네(Adolf Behne·1885~1948), 세자르 클라인(César Klein·1876~1954) 등과 함께 조직한 ‘예술노동평의회(Arbeitsrat für Kunst)’의 활동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김중업이 설계한 ‘국제주의 양식’의 삼일빌딩. [사진 윤광준]

김중업이 설계한 ‘국제주의 양식’의 삼일빌딩. [사진 윤광준]

        
1913년 3월에 뿌려진 ‘예술 노동평의회’ 명의의 전단에는 “예술과 민중은 통일되어야 한다” “예술은 소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같은 주장과 더불어 미술·공예·조각과 같은 개별 예술 양식들을 대(大)건축의 날개 아래 통합하는 것이 ‘예술노동평의회’의 목적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이 내용은 몇 달 후 설립된 바우하우스 교육 프로그램에 그대로 다시 등장한다.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었다. 급격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온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예술이었다.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예술을 위한 예술’을 그로피우스는 ‘살롱예술(Salonkunst)’이라고 비판했다. 왕과 귀족의 초상화로부터 자유로워진 예술가들에게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의 자기목적성’은 아주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특히 의도적으로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했던 ‘독일 낭만주의(Deutsche Romantik)’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슬로건이 뿌리내리기에 아주 좋은 토양이었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은 근대 부르주아의 권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본질은 ‘예술가를 위한 예술’일 뿐이었다. ‘살롱예술’에 대한 그로피우스의 비판은 바로 이 같은 자기 기만의 예술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살롱예술’에 대한 그로피우스의 비판은 ‘예술을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예술교육의 근본 질문과도 깊이 관련돼 있다. “예술교육이 가능한가?”에 대한 ‘예술을 위한 예술’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천부적 재능을 가진 예술가, 즉 ‘천재’의 영역인 예술은 가르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천재들만의 예술’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에도 암묵적으로 기능하는 예술관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과 관련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천재’ 개념은 ‘예술을 위한 예술’,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예술가를 위한 예술’의 시대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는 ‘천재’ 개념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면 분명해진다.
 
예술과 관련해 ‘천재’ 개념을 사용한 이는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다. 그는 『판단력 비판』에서 모방과 학습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능력, 즉 독창적인 능력을 설명하며 ‘천재(Geni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천재란 ‘천부적 능력(ingenium)’이며, "이를 통해 자연은 예술에 규칙을 부여한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예술은 오로지 천재의 영역이라는 칸트의 주장은 이후 독일 낭만주의에서 더욱 부풀려진다. 그 결과, ‘천재’ 개념은 예술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예술가=천재’라는 등식은 오늘날에도 ‘예술 신동의 신화’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모차르트다. 불과 서너 살 무렵, 단 한 번 듣고 복잡한 악보를 그려내고 10대 초반에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이야기는 모차르트를 이야기할 때 꼭 들어가는 ‘신화’다. ‘평범한 인간’ 살리에리는 그의 악보를 보고 질투에 사로잡혀 결국 그를 죽음에 몰아넣었다는 ‘전설’도 영화화되어 이제는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독일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1897~1990)의 주장은 전혀 다르다.
 
 
모차르트는 과연 음악 천재인가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에게 뛰어났던 것이 ‘즉흥연주 기술’뿐이었다고 말한다.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1943~)는 ‘다중지능이론(Multiple Intelligence Theory)’을 주장한다. 시험 성적으로 확인되는 인지능력이 지능의 전부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인간 지능은 아주 다양한 영역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다중지능이론’으로 설명하자면, 모차르트에게는 ‘즉흥연주 기술’이라는 아주 특별한 지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재능이 있듯, 모차르트의 ‘즉흥연주 기술’도 그런 재능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재능 또한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혹독한 훈련이 없었다면 얻어질 수 없었다. 아울러 모차르트가 당시 음악계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에게서나 관심과 사랑을 받고자 했던 ‘애정 결핍’이라는 그의 성격적 특징 때문이었다고 엘리아스는 주장한다. 아울러 ‘수공업자의 예술’에서 ‘예술가의 예술’로의 전환이라는 아주 특별한 시대적 맥락까지 더해져 ‘천재 모차르트’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를 설립할 당시, 그로피우스는 ‘천재들의 예술’이라는 독일 낭만주의적 신화를 강력하게 거부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집단적 창조의 필수조건인 ‘표준화’와 ‘천재들만의 예술’이라는 논리적 모순을 그로피우스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 『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