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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이민 110주년> ① '애니깽' 후손의 현주소

바람아님 2015. 1. 15. 12:22

[연합뉴스 2015-1-12 일자]

 

  

우리말 잊고 제사도 안 지내지만 김치·된장 먹으며 맥 이어

서울올림픽 계기로 모국에 자부심 느끼며 뿌리 찾기 나서


<※ 편집자 주 = 2015년은 멕시코 한인 이민 11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905년 5월 12일 멕시코 중서부 살리나 크루스항에 도착한 한인 1천31명은 유카탄 반도에 있는 에네켄(애니깽) 농장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며 4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후 멕시코 전역과 쿠바로 흩어졌고, 현재 멕시코에는 4만여 명, 쿠바에는 1천100여 명의 후손이 살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멕시코 한인의 현주소와 이민 역사를 소개하고 한인 후손의 인생 역정을 들어보는 3편의 특집기사를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1905년 5월 12일 '묵서가(墨西哥·멕시코) 드림'을 안고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은 모두 1천31명. 성인 836명, 어린이 195명이었다. 257가구에 독신도 196명이었다. 특히 200명이 넘는 대한제국 퇴역 군인이 포함됐다.

110년이 지난 지금, 흔히 '애니깽'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후손은 6세대까지 내려왔다. 멕시코 한인후손회에 따르면, 현재 한인 후손은 4만 명을 헤아린다. 1세는 물론이고 2세마저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며, 장년층이 된 3세와 4∼6세들은 완전히 '현지화'(멕시코화)돼 기록을 들추기 전에는 선조가 전해준 이민 역사에 대해 기억조차 희미하다.

1962년 양국 외교관계가 수립된 이후 한인 통계에 이들 후손은 잡혀 있을까. 2013년 외교부에 따르면 멕시코 거주 재외동포 인구는 1만 1천364명. 이 가운데 903명이 시민권자이고, 나머지 1만 461명은 유학생·주재원 등 재외국민이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이 밝힌 '멕시코 한인 실태 생활 조사 보고서'를 분석하면 110년 전 이민자의 후손이 외교부 통계에 들어 있을 확률은 '제로(0)'다. 한마디로 얼굴만 한국인을 닮았을 뿐 거의 멕시코인이 된 것이다.

1903년 뿌리를 내린 뒤 어느 정도 정체성을 유지해온 미주 한인 이민 사회와는 달리 왜 멕시코 한인들은 현지에 빨리 동화됐을까.

현지에서 한인 후손을 도왔던 조남환 목사는 "성인 가운데 남자 701명, 여자 135명으로 남자가 월등히 많았던 이민 당시 남녀 성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면서 "일제 치하에 놓인 고국에 돌아올 수 없는 처지여서 남자들은 한인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 수가 적어 대부분 현지인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했다.

2세들이 혼혈로 태어나면서 빠르게 멕시코화가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인 사회는 최소한 1960∼1980년대까지는 강력한 유대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사회과학연구원은 분석했다. 3·1절과 8·15 광복절을 설과 추석 대신 기념일로 정해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이민 3∼4세로 내려오면서 한인 후손보다는 멕시코인 혹은 미국인 등과 결혼하면서 '혈통'은 깨졌다.

한인 후손 3∼6세대는 그러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 된장·김치 먹으며 '한류 전도사'로 나서기도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코리안 멕시칸'들은 모국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은 그들에게 모국의 존재를 일깨워줬고, 모국이 잘산다는 사실에 자부심도 느꼈다.

이민 당시 대규모 에네켄(애니깽) 농장이 있던 메리다시에는 후손 5천여 명이 살고 있다. 아직도 우리의 초가집 모양의 집에서 거주하는 후손도 있다고 한다. 후손 상당수는 현지인과 마찬가지로 농촌에서 농사일과 막노동을 하며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에 반해 도시에 사는 후손은 중·상류층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기도 하다.

이민 100주년을 맞아 현지를 방문했던 이구홍 교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10년 전에도 한국말을 하는 후손은 거의 없고 조상의 제사를 모시지도 않았다"면서도 "다만 그들 식탁에 오르는 양배추로 만든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이 우리와의 연결 고리라고 할 수 있다"고 기억했다.

현재 많은 후손이 멕시코 주류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의사·변호사·교수·기자·회계사·사업가 등 전문 분야에 진출했다. 이들 가운데는 코리안 혈통을 자부하며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 중심에 한인후손회가 있다.

이들은 추석이나 설 명절에 멕시코 한인회와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의 후원을 받아 전통 제사를 재현하고, 윷놀이와 사물놀이도 따라 하고 있다. 멕시코 한인회 사무실 한 귀퉁이에 둥지를 틀고, 한글·김장 담그기·사물놀이 등을 배우고 한복을 입는가 하면 K-팝과 한국 TV드라마를 보며 모국을 동경하고 있다.

멕시코 한인 후손을 초청해 모국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재외동포재단 관계자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모국의 발전상을 둘러보려는 후손들의 신청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며 "모국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 한류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모국을 찾았던 후손 가운데는 거주국에 돌아가 '한류 전도사'를 자처하며 활동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진영 재외한인학회 회장은 "비록 한민족의 피는 희석됐지만 모국을 자랑스러워하는 후손에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조상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그들은 누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한국 홍보대사'이므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 회계사 등 전문직종서 두각…주 대법원장까지 진출

지난해 8월 애니깽 후손 4세인 마가리타 스밀라 게레로 로드리게스(24·여) 씨는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하며 학사모를 써 화제가 됐다. 증조부의 고향인 한국을 찾아 대학 졸업장을 받는 후손은 이민 역사 10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한국인의 뿌리'를 강조한 선조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 문화도 좋아했다고 밝혔다.

모국 유학으로까지 이어진 한인 후손의 약진은 멕시코 사회에서도 눈에 띈다. 멕시코 의회에서 유일한 한인 후손인 리스베스 로이 감보아 송(34·집권 제도혁명당) 하원의원이 우선 손꼽힌다.

법학을 전공하고 공공정책 분야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현지 여성연구소 소장 등으로 일하다 2012년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현재 한·멕시코 의원친선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한인 4세인 리스벳 로이 송 판사는 여성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킨타나 로주(州) 대법원장에 오르기도 했다.

또 한인 3세 라몬 리 씨는 유카탄 마야 유적지를 상징하는 치첸잇사 관리소장을 맡아 봉사했으며,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 집안의 후손인 노라 유 씨는 치와와주 후아레스시 시의원으로 활동했다.

김영휘 전 멕시코 한인회장은 "현지 사회에 진출한 한인 후손은 뿌리 찾기에 주저하지 않고 이민 선조의 모습도 자랑스러워 한다"며 "모국의 위상과 함께 멕시코에서 한인의 이미지가 높아지면서 모국에 대한 이들의 인식도 변화하는 만큼 이들을 포용하는 정책이 요구된다"고 조언했다.

◇ 쿠바 한인 후손, 미국과 외교관계 복원 소식에 반색

1921년 멕시코에서 쿠바로 건너간 274명의 한인은 1937∼1944년 독립운동자금 1천499달러를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다. 초대 쿠바 한인협의회 회장인 고 임천택 씨가 주도했다.

한인 후손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쿠바인들과 잘 융화해 살아왔다. 110년이 지난 지금 후손은 1천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 가운데 순수 혈통은 80여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8월 개원한 '한인후손문화원'(현지 명칭 호세 마르티 문화원 한국-쿠바 문화클럽)은 한인 후손들의 사랑방이자 모국과의 연결 고리다. 이 문화원 건립에 앞장섰던 오병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미·카리브지역협의회 회장은 당시 "한국과 쿠바의 수교를 앞당기고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쿠바의 지지를 끌어내는 매개체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쿠바에도 한국 TV드라마와 K-팝으로 대변하는 한류가 한창 뜨고 있다. 한인 3세인 안토니오 김 함(72) 한인협의회 회장은 "쿠바인들은 한국인을 굉장히 좋아하고 김치·고추장·마늘·장조림 등 한국 음식에 매우 익숙하며, 젊은이들은 한국 드라마와 K-팝을 즐겨 듣고 있다"고 소개했다.

쿠바 한인 후손도 이 같은 한류 붐을 실감하면서 뿌리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모국을 방문하려고 한국어 능력시험에 응시하는가 하면 한국 문화에 관심을 두고 TV드라마와 K-팝을 배워 현지인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지에서 무역업을 하는 한인 경제인 김 모(52) 씨는 "최근 미국과 쿠바가 외교관계를 복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이곳 한인 후손은 반색한다"며 "한국과도 하루빨리 수교를 해 자유왕래가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