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궁녀와 환관의 '슬픈 언약식'

바람아님 2015. 1. 14. 12:04

[경향신문 2015-1-13 일자]

  

"궁녀 내은이가 임금의 '푸른 옥관자(망건에 다는 작은 옥고리)'를 훔쳐 환관 손생에게 주고 서로 언약했다.(相與爲約)"

1425년(세종 7년) 서로 사랑했던 궁녀와 내시의 '슬픈 언약식'을 기록한 <세종실록> 기사이다. 풋사랑의 대가는 참혹했다.

'임금의 여인'인 궁녀가 환관과 사랑을 나누고, 게다가 임금의 물건까지 훔쳐 주었기 때문에 남녀 모두 참형을 받았다.

1453년(단종 1년) 궁녀 중비는 어린 별감 부귀에게 연정을 품었다.

15세도 안된 어린 중비는 친구 2명과 함께 글을 아는 시녀 월계를 찾아가 부귀에게 보낼 연애편지를 부탁했다.



"대궐은 넓고 적막한데 한번 만나뵈면 어떨까요."(<단종실록>)

이 연애사건은 궁녀와 별감의 3 대 3 단체미팅으로까지 번졌다. 하지만 이들이 맺은 봄날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다.

임금의 여인들이 외간 남자들과 정분을 쌓은 죄였다. 남녀 6명 모두에게 평안·함길도 관노 추방의 처벌을 내렸다.

"궁녀가 간통하면 부대시(不待時·즉각 사형집행) 참형이며, 임신 때도 출산 후 100일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집행한다"(<속대전>)는 법조항이 있었다. 3 대 3 미팅의 주인공들은 그나마 실제 간통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참형을 면한 것이다.

세조 때의 궁녀인 덕중은 '자유부인'이었다. 원래 세조의 아이를 낳아 후궁(소용)이 됐지만 아이가 죽자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환관을 연모했으며, 그것도 여의치 않자 종친인 귀성군 이준(세종의 손자)을 짝사랑해서 2번이나 연애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귀성군은 임금에게 달려가 고한다. 번번이 덕중의 실행을 용서하던 세조는 결국 교수형을 내리고 만다. 세조 임금이 좀 낫다고 할 수 있다.

만고의 성군이자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은 궁녀의 연애사건이 날 때마다 '법대로'를 외치며 극형을 일삼았다. 예컨대 1435년(세종 17년) 종친인 신의군 이인(태조의 손자)과 그의 매부인 김경재는 궁녀 장미를 사주해 거짓으로 병을 칭해 출궁하도록 했다. 그런 뒤 여러 날 동안 질탕하게 데리고 놀았다. 세종은 신료들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궁녀 장미에게만 참수형의 처벌을 내렸다. 지금도 꽃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임금님! 성군이 맞사옵니까.'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