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현대미술 이야기 no.4 -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바람아님 2015. 4. 14. 16:20

[J플러스] 입력 2015-04-13 


 

야수파의 탄생

     1905년 파리. 전통과 형식을 중시하는 <살롱>전과는 달리, 진보적인 성향의 전시회<살롱 도톤느>의 세 번째 전시가 개최되었다. 마티스는 이 전시회에 추구하는 예술 성향이 같은 앙드레 드랭, 모리스 블라맹크, 알베르 마르케 등과 함께 작품을 출품했다. 이들의 혁신적인 작품들은 마르케가 출품한 소년 두상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져 진열되었는데, 이를 본 당대 미술평론가인 루이 보셀은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라고 외쳤다 한다. 루이 보셀의 야수라는 언급은 강렬한 원색의 거침없는 색채구사와 정리되지 않은 투박한 선으로 그려진, 당시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는 이들의 작품을 폄하하는 의도로 사용된 용어이지만, 곧바로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면서 야수들의 작품은 관심을 받게 된다. 20세기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야수주의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사물을 표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술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루이 보셀이 야수로 칭한 작품 중 가장 큰 비난을 받은 것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었다

 

모자를 쓴 여인.png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 캔버스에 유채,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마티스의 부인을 모델로 하여 그린 이 작품은, 여성을 모델로 한 아름다운 초상화에 익숙해져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주최측마저 전시를 꺼려했다고 한다. ‘야수라는 표현과 어울리는, 거친 붓놀림으로 쓱쓱 발라놓은 물감자국과 폭발하듯 강렬한 원색의 색채. “색채의 해방을 지향한 야수파의 중심이었던 마티스는 자신만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재해석된 색채로 캔버스를 채웠다. 마티스로 인해 대상의 고유색은 모두 부정되었고, 작가의 감정과 느낌으로 표현된 주관적인 색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로써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작품은 야수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혼돈스럽거나 무질서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티스의 작품은 구성요소가 모두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실제로 그는 나는 균형이 잡힌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람들이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그림을...”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마티스에게 있어 구성또한 작가의 뜻에 따른 방식으로 배열하여 작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왕의 슬픔.png

앙리 마티스, <왕의 슬픔>, 1952, 과슈를 칠한 색종이 콜라주, 조르주 퐁피두 센터

 

 마티스는 1941년 받은 십이지장암 수술로 인해 작품의 성격이 크게 변하게 된다. 수술 후 하루에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게 된 마티스는 더 이상 이젤 앞에서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스스로 가위로 그림그리기라고 부르는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생생한 컬러를 종이에 칠하고 가위로 잘라 캔버스에 배치하는 이 소박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마티스의 예술영역이 한층 더 확장되게 된다. 1952년에 제작된 <왕의 슬픔>은 이러한 작품 중 가상 완성도가 높은, 마티스의 회화적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왕의 슬픔>은 건강악화로 인해 평생에 걸쳐 사랑해 왔던 작품주제인 스튜디오, 여성모델, 음악, 춤에 이별을 고하는 자서전적인 작품이다. 스스로를 투영한 검은 형체로 표현된 왕은 무희와 오달리스크사이에서 기타를 들고 웅크리고 있는데, 이 형태는 휠체어를 탄 마티스의 모습과 눈물을 연상시킨다. 마티스의 인생과 예술의 자화상인<왕의 슬픔>은 마티스의 상징적 꼴라주 기법과 60년 이상 계속된 그의 예술 세계의 절정으로 평가된다.

 

 

또 다른 작품

 

마티스성당1.png

 

     사진속의 공간은 1948, 마티스에 의해 장식된 프랑스 남동부 방스(Vence) 로자리오에 있는 도미니카 성당으로, 로제르 성당, 마티스 성당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티스가 성당의 장식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병에 걸린 자신을 극진히 돌봐준 간호사가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는 설과, 1941년에 심각한 수술을 두 차례 받고난 후 무신론적 생활을 회개하고 회복함을 감사하는 뜻에서 작업을 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파란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하여 매우 단순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이 성당에 들어가면, 마치 마티스의 작품 속으로 들어온 느낌을 받게 된다. 마티스는 타일위에 그려진 간결한 벽화들과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제단위의 십자가와 신부의 예복도 디자인 했다.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의 성당은 현대미술의 거장 마티스가 장식을 맡음으로써 현대 건축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