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초점]"미인도, 천경자는 자식 몰라 볼 수 있느냐 했지만.."

바람아님 2015. 11. 4. 00:48
뉴시스 2015-11-3

"미인도는 위작이 아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58)씨가 사후 재 점화 된 '천경자 위작 논란'에 뛰어들었다. 천 화백 별세와 함께 불거진 위작 논란은 24년 전이나 후나 세상을 흔들고 있다. 일반 정서는 '황당하다'는 분위기다. "도대체 작가가 아니라는데, 돌아이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정준모씨는 '합리적 의심'을 하자고 나섰다. "위작이 아니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분석해 글로 내밀었다. 주변에서 "세상에 네 말 믿는 사람 아무도 없다. 조용히 있으라고 한다"면서도 "객관적인 '사실'이 밝혀져야한다"는 주장이다. 정씨는 1996년부터 200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으로 근무했다. 한국미술품감정협회 감정위원(유화)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술판 '용자(勇者)'로 떠오른 그의 말을 들었다.


【서울=뉴시스】금성출판사 선집 104쪽에 실려있는 도판번호 16 '나비와 여인'(미인도) <정준모씨 제공>
【서울=뉴시스】금성출판사 선집 104쪽에 실려있는 도판번호 16 '나비와 여인'(미인도) <정준모씨 제공>

【서울=뉴시스】도록에 수록된 '미인도'(흑백)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인도'(컬러) 오른쪽 도판은 트리밍 과정에서 좌우가 잘려나가 크기가 커 보인다.
【서울=뉴시스】왼쪽부터 위조범 권○○이 1970년대 말 '미인도'를 그리며 모본(母本)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천경자 작 '장미와여인'(1981), 우측 '미인도'의 어깨에 있는 나비를 그리기 위해 참고했다는 '고'(1974), 국립현대미술관으로 1980년 4월 이관된 '나비와 여인'(미인도)
【서울=뉴시스】왼쪽부터 위조범 권○○이 1970년대 말 '미인도'를 그리며 모본(母本)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천경자 작 '장미와여인'(1981), 우측 '미인도'의 어깨에 있는 나비를 그리기 위해 참고했다는 '고'(1974), 국립현대미술관으로 1980년 4월 이관된 '나비와 여인'(미인도)
【서울=뉴시스】왼쪽은 천경자 '고'(39×26㎝·1974), 오른쪽은 위조범 권○○이 '고'를 보고 제작한 위품. 위품 3~4점을 원본과 비교하면 진작과 모작이 확연히 구분된다. 권○○은 '고'를 위작해놓고 '미인도'에 나비를 그려넣는 데 참고한 것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서울=뉴시스】왼쪽은 천경자 '고'(39×26㎝·1974), 오른쪽은 위조범 권○○이 '고'를 보고 제작한 위품. 위품 3~4점을 원본과 비교하면 진작과 모작이 확연히 구분된다. 권○○은 '고'를 위작해놓고 '미인도'에 나비를 그려넣는 데 참고한 것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오지랖이 넓은건 알지만 왜 나선 것인가(그는 전시기획, 평론, 행정을 아우르는 미술판 마당발이다) 한국미술품감정협회 감정위원들을 대변하는 것인가.

"감정협회하고는 관계없다. 내가 감정위원이긴 하지만 내가 그곳을 대변하기 위해서 이러는건 아니다.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면 메르스 사태가 났을 때 밉든 곱든 정부는 전문의사들로 구성된 대한감염학회와 함께 대책반을 꾸려서 대응하지 않나. 지금 상황은 누가 아픈데 동네 의사한테 안 데려가고 무당한테 데리고 가는 식이다. 전문가 말을 안 믿는게 답답하다. 나는 1999년 미술관에 있을 때도 그랬다. '국립현대미술관 말을 믿을거냐, 위작범 말을 믿을거냐'고 했다. 오죽 갑갑했으면 그랬을까."


-'위작이 아니다'는 근거, 다시 들어보자.

"딱 하나만 이야기하자. 1990년 1월 금성출판사에서 출간된 '한국근대미술선집' 중 11권인 '장우성-천경자편'에 그 '미인도' 작품이 흑백 도판으로 수록돼 있다. 그 도판이 어떻게 들어가 있는 것일까. 다 떠나서 이것도 따져보자. '미인도' 사건이 터진 것은 1991년 4월인데, 위작이라면 어떻게 1년 전에 나온 책에 그림이 실렸겠는가."


-1999년 '내가 그렸다'는 위작범 권모씨가 등장했다. '미인도'는 자신이 그린 작품이라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그것도 따져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 권○○은 1991년 1984년에 그렸다고 했던 주장을 이번에 번복했다. 70년대 말에 그린 작품이라면서 자신이 그린 천경자의 위작은 총 4점이라고 밝혔다. 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천 화백은 눈동자에 금분을 쓰는데 나는 싼 노란 물감으로 채색했다. 얼굴의 음영도 내가 그린 건 딱딱하다. 머리카락도 뭉뚱그려서 그렸다. 나비는 천 화백의 다른 그림 '고'(1974)을 보고 따서 그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천경자가 인물의 눈동자에 금분을 쓴 것은 80년대 중후반 이후에 나타나는 기법이다. 70년대 천경자는 인물 눈동자에 금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위품을 제작하기 위해 천경자의 그림을 눈여겨보고 관찰한 것이 적어도 80년대 이후라는 가설도 가능하다."


-최근 그는 TV에 나와 위작을 그릴때 모본으로 삼았던 그림을 보여주면서 위작을 만들었다는 걸 설명까지 했다.

"나도 봤다. 그의 말에서 분명한 오류가 나타난다. 사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았다. 방송에서 그는 천경자가 자신의 들째 딸을 모델로 그렸다는 '장미와 여인'을 모본으로 삼아 그림의 전체를 구성하고, 1974년작 '고'에서 나비를 따 어깨 위에 배치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들고나온 원본 '장미와 연인'을 보면 좌측하단에 분명 '鏡子 1981'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말을 들으면 권○○이 다시 또 말을 바꿀지 모르겠다. 그는 1999년 진술했던 위작 제작연도가 1984년이라고 했던 것을 1978년 또는 1970년대 말이라고 다시 번복했다. 어떻게 1981년에 완성된 그림을 1970년대 말에 보고 그 원작을 토대로 가짜그림을 그렸을 수가 있을까? 시간여행자가 아니라면."


-권○○은 왜 그러는 것일까.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위품을 제작했다는 말이 된다. 잘난 체 하는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났을때 이런 말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다. '청전 이상범의 그림을 정말 감쪽같이 그리는 자신을 왜 세상은 대가 대접을 안 해주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이었다. 내가 그랬다. '당신이 대접받으려면 이상범 그림을 안 보고 그리면 대접해준다. 당신은 남의 것을 보지 않고는 그리지 못하는 사람 아니냐.' 사실, 보고 베끼는 것 누가 못하나? 그 사람은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다. '귀신같은 실력을 가진 사람'으로 남고 싶은거다. 그는 지금도 고서화 수복을 하면 살고 있다. 실력이 있다고 소문이 나야 일감이 올 것 아닌가?"

(권○○은 1978년에도 문화재급 그림을 위조하고 유통시킨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유명작가의 진품 위에 얇고 투명한 기름 먹은 습자지를 대고 목탄으로 밑그림을 베낀 다음, 그 습자지를 화선지 위에 올려놓고 먹으로 베껴낸대로 따라 그리면 아래 화선지에 먹이 배어나 윤곽이 드러난다. 그후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넣고 채색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미인도' 사건이 나던 해인 1991년 2월에도 청전 이상범, 이당 김은호 등 6대 화가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위조해오다 적발되어 수배를 당했고, 1995년 9월에 고미술품 위조 사건으로 체포됐다. 1999년 문화재 및 미술품 위조 유통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천 화백의 그림은 베끼기 쉽다는 말도 있다.

""권○○은 원래 청전 이상범의 가짜를 잘 만드는 인물로 인사동에서는 알려진 인물이다. 수묵전문 위작자인 그가 채색화, 천경자의 그림을 가짜로 만든다는 것은 사실 어렵다. 그는 수묵화를 주로 뒷장 떼기나 앞장 떼기 방식으로 위작을 만든다. 이 방법은 그림이 그려진 원본을 다시 표구하면서 물에 불려 여러 겹으로 배접된 작품의 뒷장이나 앞장을 떼어 분리시켜 두 장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중국에서 수입된 옥판선지의 경우 3장, 한국의 장지도 2장 정도는 가볍게 떼어 내 위작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천경자 작품의 경우 채색화이기 때문에 주로 환등기 비추기나 아니면 직접 조합해서 그리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한다. 그래서 위작인 경우 채색이 조악하고 필치가 빠르지 않아 리듬감이 떨어져 쉽게 위작임을 알아볼 수 있다."


-다시 돌아가보자. 권○○이 미인도를 그렸다고 한 것은 1984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미인도가 들어온 것은 언제인가.

"미술관에 이관된 것은 1980년 4월이다. 그러니까 권○○이 정말 미인도를 그렸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미술관에 들어오고 4년이 지난 후에 그렸다는 분명하고도 실증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위조범 권○○의 한 마디에 미인도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래서 작가 생전에 만든 도록에 엄연히 실려 있는 작품이, 그리고 이렇게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무시되고 다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 등지에서 검토하고 시료를 분석하고 요란법석을 떤 끝에 다시 진품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1979년 10·26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상당수 미술품이 발견됐다. 이를 압류해서 보관했던 상공부 창고에서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을 그린 인물화를 보고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위원이었던 오광수(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는 천경자의 작품이라고 확인했다. 이후 그림은 문공부를 거쳐 절차에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됐다. '미인도'라는 제목은 검찰 직원이 압류품 목록을 만들며 임의로 붙인 것이다. 이후 10여년이 흐른 후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종로의 현대그룹 사옥에서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전시를 기획하며 문제의 '미인도'를 전시했다. 그 이미지로 아트포스터를 900장 인쇄하여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5만원에 판매했다)


-어느 사우나에서 포스터를 구입하여 장식용으로 액자에 넣어 걸어 놓았고, 천 화백의 지인이 '선생님 작품이 목욕탕에 걸려 있더라'고 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 됐다는데.

"맞다. 그 얘기를 들은 천 화백이 '내 그림일 리 없다'며 노발대발했고 인쇄물을 본 후 미술관에 '내 그림이 아니다'라고 통보했다. 원작을 보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때 천 화백이 공개적으로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적 없다'며 미술관에 진위감정을 의뢰했다. 당시 국내 유일의 감정협의체인 화랑협회 감정위원회는 3차에 걸친 감정 끝에 진품이라고 결론지었다. 화풍은 물론 천경자 작품을 주로 표구한 동산방 화랑의 표구가 표구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이 근거였다. 하지만 논란은 계속됐다. 미인도 사건은 사회전체가 이성적으로 움직이고 조금 더 주의를 기울렸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해결될 일이라니, 무슨 말인가.

"천 화백의 감성적인 말 '내 새끼를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있냐'는 그 말이 세상의 모든걸 다 덮고 있다. 내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건 1998년 국정감사 답변서를 준비하면서다. 1990년 한국근대회화선집에 실린 '미인도'를 발견하여 제시하면서 진위여부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는 듯 했다. 이 작품은 선집에 '나비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는데 1977년에 둘째딸을 모델로 그린 것이었다. 도록에 실으면서 트리밍 과정에서 약간 잘려나가 원작보다 이미지가 조금 더 크게 보인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 중 중요하다고 판단해 편집자와 의논해서 수록했을 것이다. 또 최소한 수차례에 걸쳐 교정을 보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경자 화백은 왜 이 작품을 위작이라면 빼지 않았을까? 천경자의 미인도의 위작 시비가 일어난 것이 1991년인데 어떻게 1990년 1월5일에 발행된 장우성-천경자 화집에 수록되었을까? 내가 합리적 의심을 하는 첫번째 이유다. 어찌보면 자신의 그림이지만 많이 낡고 바랜 나머지 속이 상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천 화백은 '내 자식 내가 몰라보겠느냐'며 절필선언까지 하지 않았나.

"과연 절필했었나?"


-1991년 4월 '붓을 들기 두렵다'며 미국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니다. 1991년 12월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한 이후 미국, 타히티, 아프리카, 사모아 등지를 여행하며 작품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당시 예술원 회원 탈퇴도 선언만 했을뿐 실제로 탈퇴하지는 않았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그 후 1998년에 자신의 주요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자식들이 살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그래도 자식을 몰라볼 수가 있을까.

"작가들 말은 100% 믿을게 못 된다. 천경자 화백은 예전에 '인도 무희도'를 가짜라고 한 적이 있다. 다행히 출처가 밝혀져서 조용해졌다. 내 자식 내가 몰라볼 수 있다. 애가 1000명 된다고 생각해봐라. 이름이나 외우겠는가."


-'위작 논란'은 이제 대를 이었다. 자녀들도 천 화백과 같이 '위작이다'고 하지 않나.

""무슨 근거로 아니라고 하느냐. 유족들은 결정적 증거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내 놓으면 될 것 아닌가. 천 화백이 둘째딸을 '모델로 그렸다'고 했다. 미인도와 유사한 스케치를 하고 담채로 색을 올린 ‘바리의 여인’(1974년작)같은 작품을 보면 미인도의 밑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지난달 기자회견하면서 사위가 '어떤 감정위원이 회유로 인해 동조를 했다'고 했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밝혀라. 내가 알기론 그런 감정위원은 없다. 또한 권○○이 그렸다는 위작이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된 현재의 미인도와 같은 작품이라는 증거가 있는지, 그가 만약 위작을 그렸다 해도 그것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문제의 미인도와 같은 작품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공소시효가 지났는데 권○○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는 사람의 이름을 못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만 밝히면 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미인도', 아니 '나비와 여인'을 제대로 돌아봐야하지 않을까."


-진품임을 왜 이렇게 확신하나.

"이미 감정가들이 3차에 걸쳐 감정을 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KIST에서 과학적 감정을 거쳐 진품이라고 확정을 했지 않은가. 동산방 표구 대장과 작품 속 목재에는 빨간 펜으로 '천경자'라고 쓰여있고 표구 번호도 있다. 다시 수사하고 감정하자는데 현재까지 이 작품을 두고 진품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모두가 대한민국 그 분야의 최고들이다. 어느 누구에게 묻자는 것인지. 다시 물어서 또 진품이라는 결론이 나오면 그때는 승복을 할 것인가?"


-24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반적인 시각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그 세월 동안 천경자 화백은 뇌출혈로 쓰러졌고 8월6일 91세로 별세했다.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더욱 화제다.

"절필과 탈퇴, '내 자식을 내가 모르겠느냐'는 감성적인 대응이 판을 키웠다. 객관적이고도 실증적인 자료를 가지고도 반박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자식들은 천 화백 유골도 못 찾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는 없고 작품의 진위 문제를 호기심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천경자의 죽음과 그의 예술에 대한 재평가와 해석, 미술사적 업적은 없고 '미인도 사건'의 주역으로 남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게다가 스스로 위품을 만들었다는 자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의 호기심에 기름을 붓고 있다. 이제 감성보다는 이성으로 차분하고 꼼꼼하게 돌아보자. 미술품 감정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지식으로 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실증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퍼즐을 맞추어 보면 명백하게 답은 나온다. 나는 왜 이렇게 국민들이 이구동성으로 미술품의 진위여부에 관심을 갖는 배경이 무엇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사회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