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04-06 03:00:00
소주를 고아내는 증류기인 소주고리.
황광해 음식평론가
태종 4년 7월에는 조정에서 경상도로 보낸 경차관(敬差官) 김단이 옥주(沃州·지금의 옥천)에서 급작스럽게 죽는다. 역시 소주가 문제였다. 한양을 출발해 경상도로 향하다가 청주를 지나면서 소주를 과하게 마셨다. 결국 청주에서 멀지 않은 옥천에서 ‘과다 음주’로 사망했다. 중앙관리가 출장을 가면 지방 관리들은 필요한 물품, 음식 등을 마련하여 접대한다. ‘지응(支應)’이라는 공식적인 행사다. 김단 역시 지응 자리에서 소주를 과하게 마신 것이다.
세종대왕도 소주로 골치를 썩인다. 알려진 대로 양녕대군은 천하의 술꾼. 더하여 자기만 마시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음주를 권하는 것도 문제였다. 세종 4년(1422년) 11월, 사헌부에서 양녕대군을 탄핵한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돌로 집을 꾸미는데 소주를 지나치게 먹여서 인명을 상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양녕대군 소주 사건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이듬해인 세종 5년, 이번엔 문무관 2품 이상이 연대하여 양녕대군을 탄핵한다. 이 탄핵에는 ‘소주를 먹여서 한 사람을 죽게 했다’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래도 양녕대군은 꾸준히 소주를 마셨다. 세종 14년(1432년) 7월의 기록에는 세종이 양녕대군에게 좋은 안주와 소주를 내렸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세종대왕의 백부 진안대군 이방우 역시 술꾼이었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했던 진안대군은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스스로 몸을 숨긴다. 그는 오래지 않아 사망한다. ‘태조실록’에는 ‘진안군이 술을 좋아했다. 날마다 마시더니 결국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했다.
세종 15년 3월의 기록에는 세종대왕의 술에 대한 ‘속마음’이 나온다.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로 목숨을 잃는 이도 흔하니 술을 과하게 마시지 못하게 법을 세우자”고 건의한다. 세종이 간단하게 대답한다. “비록 굳게 금하더라도 그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조가 물러서지 않고 “그래도 법을 세우자”고 하니 마지못해 대답한다. “술을 경계하는 ‘주고(酒誥)’를 내리겠다.”
고려시대 김진은 소주 때문에 전쟁에서 패하고 유배를 갔다. 우왕 2년(1376년) 12월, 왜구가 합포(지금의 마산 일대)를 침범했다. 평소 원수 김진은 예쁜 기생, 측근들과 밤낮으로 소주를 마셨다. 주변 사람들이 이들을 두고 ‘소주도(燒酒徒)’라고 불렀다. ‘소주 마시는 패거리’란 뜻이다. 마침내 왜구가 침입했는데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고 “소주도에게 공격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결국 김진은 패전했다. 조정에서는 김진을 서민으로 강등하고 가덕도로 귀양 보냈다.(‘동사강목’)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소주는 원나라 때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견도 있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소주가 원나라 때 전해졌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송나라 사람 전석이 이미 섬라주는 소주를 두 차례 내린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두 차례 내리는 환소주가 있으니 섬라주와 같다. 오키나와와 사쓰마의 소주는 포성주(泡盛酒)라 한다‘고 했다.
‘섬라’는 태국으로 추정한다. ‘포성주’는 지금도 남아 있다. 소주는 기원전 3000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시작되었다. 원나라 시절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이덕무의 주장도 무시할 바는 아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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