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설왕설래] 단동(丹東)

바람아님 2016. 6. 15. 00:37
세계일보 2016.06.14. 18:10

단둥은 우리의 역사무대다. 우리 식으로 읽으면 ‘단동’이다. 1874년 만주 봉금령을 푼 청조, 2년 뒤 그곳에 안동(安東)현을 세웠다. 그 이름에 여진족의 고향 만주가 평온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까. 안동이 단동으로 바뀐 것은 중국 문화혁명 때인 1965년이다. 왜 바꿨을까. ‘붉을 단’(丹)의 음훈은 ‘정성스러울 란’이기도 하다. 거란(契丹)을 이를 때 쓰는 한자다. ‘붉은 중국’을 기린 걸까, 거란의 자취를 남긴 걸까.

그곳에는 우리의 역사 유적이 사방에 널려 있다. 단동 북쪽의 봉황성. 연암 박지원이 그곳에 간 것은 봉금령이 한창 행해지던 때다. 고구려 봉황성을 두 눈으로 직접 본 그의 가슴은 얼마나 뛰었을까. 이렇게 썼다. “요동은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사람들은 숙신 예맥 등 동이 종족이 모두 위만조선에 복속했다는 것을 모르고, 오랄 영고탑 후춘이 모두 고구려 땅이었음을 모른다.” 숙신은 여진의 옛 이름이다.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봉황성 30리 밖 화려한 거리를 본 뒤에는 이런 글을 남겼다. “중국이 이처럼 번성할 줄은 미처 몰랐다.” 박지원의 정체된 조선사회 비판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동쪽의 호산산성. 명나라 식으로 새로 꾸민 이 성의 원래 이름은 박작성이다. 고구려의 고성이다. 당 태종의 침략군에 맞선 고구려군. 박작성 성주 소부손(所夫孫)은 1만 보기(步騎)를 이끌고 죽음으로 침략군에 맞선다. 당 설만철의 3만 수군, 압록강에 시신만 가득 남긴 채 끝내 박작성의 고구려 깃발을 뽑지 못했다.


단동은 지금도 우리의 역사무대다. 북한 때문이다. 북한 대외 교역의 7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 좁은 다리를 오가는 낡은 화물차에서 피폐한 북한 경제의 실상은 그대로 드러난다. 2015년 9월 용천 폭발사고 때 세계의 외신기자들이 몰려든 곳이 바로 단동이다. 그런 단동에는 역사상 보기 드문 첩보전이 벌어진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단동처럼 공작원이 우글거리는 곳도 드물다.”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뿐일까. 미국, 일본 공작원은 없겠는가. 그들은 그곳에서 두 눈에 쌍불을 켠 채 중국의 대북 제재를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중국 공안이 단동에서 북한 공작원 간부를 구속했다. ‘조국 대표’로 불리는 인물이니 거물이다. 그의 집에서 현금 3000만 위안과 금괴도 압수했다고 한다. 평양의 위정자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할까. 더 궁금한 것이 있다. 그 일을 처음 자세히 전한 곳은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다. 일본의 단동 첩보조직이 전한 내용일까.


강호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