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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유럽이라는 기차의 운전석에 타라”

바람아님 2016. 7. 8. 00:22
[중앙일보] 입력 2016.07.06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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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국제경제팀장


칼레는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주에 위치한 작은 항구도시다. 영불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가장 가까운 유럽대륙이다. 물리적으로는 멀지 않지만 이곳을 둘러싼 영국-유럽 갈등의 골은 깊기만 하다. 영국과 프랑스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00년 전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영국이 우세했다. 1347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정복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잔다르크 같은 영웅이 등장해 결국 프랑스가 승리했다.

그럼에도 칼레는 프랑스에 함락되지 않고 영국 땅으로 남아 무역 기지로 활용됐다. 칼레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프랑스는 1558년 3만여 군사를 동원해 2500명 영국인이 지키던 칼레항을 정복했다. 당시 정신분열증 등을 앓던 영국 여왕 ‘피의 메리(메리 1세)’는 칼레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화병과 정신분열증이 심해져 결국 죽고 만다.

이런 역사를 간직한 칼레는 지금 또 다른 긴장과 갈등의 화약고가 됐다. 칼레와 영국 도버 사이는 34㎞에 불과하다. 두 지역은 유로터널을 통해 이어진다. 영국으로 가려는 아프리카나 중동의 난민 6000여 명이 칼레에 몰려 난민촌을 형성했다. 프랑스 경찰은 난민들이 터널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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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영국 유권자들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선택한 핵심 이유 중 하나가 이민·난민 문제 때문이었다. 이민자(난민)들이 영국으로 넘어와 일자리를 빼앗고, 복지 혜택 등을 누린다는 불만이 표심으로 작동했다.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은 브렉시트 결정 이후 텔레그래프지 기고문에서 “이민 문제가 아니라 주권 회복이 브렉시트를 이끌었다”고 했지만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영국에 뿌리 깊은 반(反)유럽대륙 정서라는 모닥불에 이민자에 대한 불만이라는 휘발유가 뿌려지자 브렉시트로 폭발한 것이다.

브렉시트는 개방과 세계화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로부터의 일탈이다. 신자유주의에서 양극화는 불가피하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글로벌 차원의 상품·서비스·자본·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추진하는 게 신자유주의다. 규제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민영화의 시대는 그렇게 해서 열렸다.

영국의 대처 정부,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1980년대에 이 조류를 채택하면서 급속히 세계의 주류 사상으로 떠올랐다. 효율이 높았다. 장벽을 낮추고 규제를 없앴더니 뛸 수 있는 운동장이 넓어졌다. 승자가 챙길 수 있는 몫이 많아진 이유다. 남보다 기술이 뛰어나거나, 지식이 많거나, 심지어 눈치라도 빠르면 더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경쟁에서 밀릴수록 궁핍의 멍에는 더 무거워졌다는 뜻이다.

이런 판에서 낙오되고 소외된 저소득·저학력 계층이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더 이상 양극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분노의 표출이다. 이 외침은 영국은 물론 전 세계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부(富)가 소수에 집중되는 세계 질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낙오자를 보듬는 다양한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부자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고, 가난한 이들의 임금을 높이고, 법인세를 올리는 등 해법이 쏟아진다. 충분히 이해한다. 이 난제를 풀지 못하면 세계는 더 극단으로 갈라질 테고, 종착역은 신고립주의가 될 터다. 고립은 보호무역주의를 불러온다. 그 결과는 세계 경제의 동반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해법 찾기가 시급하지만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소득재분배라는 이름으로 고소득자나 법인의 세금 부담을 늘리고,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격차를 줄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단순히 퍼준다고 계층 간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다. 가장 좋은 해법은 일자리다. 낙오되고 소외된 이들이 희망을 품고 일할 그런 일자리가 필요하다. 일자리는 기업이 투자를 통해 만든다. 규제완화, 구조개혁, 노동시장 유연화 등이 필요한 이유다.

영국과 EU는 이제 긴 협상에 들어간다. 100년 전쟁과 같은 무력 다툼은 아니겠지만 사실상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과 다를 바 없는 협상이다. EU 단일 시장 접근권을 요구하는 영국과 상품·서비스·노동·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지 않는 한 타협은 없다는 EU 측이 첨예하게 맞선다. 협상 결과에 따라 세계 경제에는 상당한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영국의 반유럽 정서는 정치 지도자에게도 뿌리 깊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모든 문제는 유럽대륙에서 발생했고, 모든 해결책은 영어사용권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연 그도 유럽 단일시장은 환영했으나 단일 통화나 정치적 공동체는 원치 않았다. 반면 대처와 정치 인생을 거의 같이했던 외무장관 제프리 하우는 달랐다. 그는 “영국은 유럽이라는 기차의 뒤칸이 아니라 운전석에 타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간은 없다』 박지향)

하우는 해임됐지만 그 울림은 지금 더 크다. 100년 전쟁이 끝난 뒤 유럽은 중세 봉건시대를 접고 근대의 문을 열었다. 영국과 EU는 브렉시트 협상을 통해 개방과 세계화라는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양극화를 해소하는 해법을 찾기 바란다.

김종윤 국제경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