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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어머니께 권하고 싶은 책

바람아님 2016. 9. 6. 07:49

(출처-조선일보 2016.09.06 길해연 배우)


길해연 배우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해도 듣는 이를 유쾌하게 만들면서도 의미를 곱씹어 보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핀란드 작가 투오마스 퀴뢰의 글은 경쾌하면서도 재치가 넘친다. 혼자 키득대며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소설'괴짜 노인 그럼프'를 읽다 보니 순식간에 책의 마지막 장이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이 분명하다"며 못마땅한 얼굴로 툴툴거리는 괴짜 노인 그럼프.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읽힐 추도문을 직접 쓰고 죽은 뒤에 누울 관을 짜고 장례식 절차를 정하고 
나무 묘비를 만들고 유언장을 준비한다. 평생 그래 왔던 것처럼 죽음에 대한 준비 또한 성실하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나이와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삶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그는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일갈하고, 자신을 걱정하며 요양원으로 보내려는 
아들을 향해서는 "자식들은 근심과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해 늙어가는 부모를 눈앞에서 치워버리려는 겁쟁이"라며 
요양원 가기를 거부한다.

[일사일언] 어머니께 권하고 싶은 책

삶의 필연적 종착지인 죽음을 너무나 열심히 준비하는 

그럼프의 모습은 좌충우돌 웃음을 선사하지만 웃음 끝엔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어린 날 도살업 보조로 일을 시작해 
톱질을 하고 농사를 짓고 고기 자르는 일을 해온 그럼프는 
가족들과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고 싶었지만 그 밥을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일을 하러 나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네 부모님들과 현재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처음 시작부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책의 
어느 대목에서도 비장함이나 엄숙하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살면 앞으로 얼마나 살겠니…." 
요즘 들어 부쩍 이 말이 잦아지신 내 어머니에게도 이 책을 
슬며시 권해봐야겠다. 
살아온 나날처럼,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핀란드 할아버지처럼 내 어머니와 내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나눌 수 있기를 바라본다.








괴짜 노인 그럼프 : 투오마스 퀴뢰 장편소설 

투오마스 퀴뢰/ 이지영/ 세종서적/ 2016/ 303 p 

839.64-ㅋ778ㄱ/ [정독]어문학족보실(새로들어온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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