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데스크에서] 중국으로 달려간 독일

바람아님 2017. 6. 13. 08:29

(조선일보 2017.06.13 안용현 국제부 차장)


리커창 중국 총리는 지난 2014년 10월 베를린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났을 때 중국 고대 발명품인 

'노반 자물쇠(魯班鎖)'를 선물했다. 이 자물쇠는 춘추전국시대 발명가 노반이 팔괘(八卦) 원리를 이용해 만든 것인데, 

해당 열쇠가 아니면 절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노반은 '중국판 에디슨'으로 통한다. 

리커창은 노반 자물쇠를 건네며 "양국이 공동으로 (기술) 혁신에 나선다면 풀지 못할 난제는 없다"고 말했다.


중국은 독일의 기술을 원하고 있다. 

특히 제조업 업그레이드를 위해 추진 중인 '중국 제조 2025'가 성공하려면 독일 첨단 기술이 절실하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일본 기술의 도움을 받았지만 지금 중·일 관계는 영토·역사 문제 등으로 껄끄럽다. 

독일은 중국 시장이 필요하다. 최대 시장이던 미국은 무역 장벽을 쌓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미국을 제치고 독일의 최대 무역 파트너가 됐다. 

중국 매체는 올해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양국 관계를 '하늘이 맺어준 배필(天作之合)'에 비유했다.


2차 대전 때 적국(敵國)이던 두 나라를 한 배에 타게 부추긴 쪽은 미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말 유럽연합(EU) 지도부를 만나 독일의 대미(對美) 무역 흑자를 비판하며 

"독일 사람들은 매우 나쁘다"고 했다. 트럼프는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에 대해서도 언제든 보복할 태세다. 

메르켈은 트럼프의 발언 직후 "우리가 다른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대는 끝났다. 

유럽인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개척해야 한다"고 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유럽 질서에서 독립하겠다는 '폭탄선언'인 셈이다. 그러고는 이달 초 베를린에서 

리커창을 다시 만나 '중·독 협력'을 강조했다. 중국을 향한 동진(東進) 정책에 속도를 내겠다는 뜻이다. 

시진핑 시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신실크로드)'는 서진(西進) 정책이다. 

'아시아 복귀'를 내걸고 동쪽에서 압박하는 미국을 피하려는 전략이다.


미 외교 거물인 헨리 키신저는 저서 '세계 질서(World Order)'에서 '(앞으로) 유럽은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며 

'대서양 협력 관계를 발전시키거나 더욱 중립적 입장을 택하거나 유럽 외 강대국과 암묵적 협약을 맺고 집단을 이룰 

수 있다'고했다. 

대서양 협력의 중심이던 미·영은 지금 유럽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반면 유라시아의 독일과 중국은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작년 6월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한 날 중국 주도의 안보 협력체인 상하이협력기구(SCO)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정회원국 가입을 결정했다. SCO는 중국이 러시아·중앙아시아와 손잡고 아시아에 구축하려는 신(新)안보 질서다. 

기존의 세계 균형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중독동주(中獨同舟·중국과 독일의 한배 타기)'는 키신저가 예견한 

세 번째 세계 질서를 여는 신호탄일 수 있다. 

우리로선 미·일 밖에서 새로 형성되는 변화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