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3.29. 15:51
승려인 親兄과 함께 佛經 번역.. 양 진영에서 모두 비판받기도
고정된 생각의 틀 깨면 행동 반경도 넓다는 걸 보여줘
선배 스님 한 분이 소셜 미디어인 페이스북에서 식우(拭疣) 김수온(金守溫· 1410~1481)에 대한 글을 올렸다. 선비와 승려가 자신을 동시에 헐뜯기에 처신하기 어렵다는 식우 선생의 푸념에 공감한 까닭이리라. 식우 선생은 생전에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추구했다. 그래서 양 진영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까닭에 감당해야 할 수업료였을까.
15세기 집현전 학사 출신인 식우 선생 이야기는 몇 년 전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 때 처음 들었다. 그는 조선 초 세종·세조 때 한글 창제와 불경 번역에 힘을 보탠 신미(信眉·본명은 守省) 스님의 동생이다. 답은 현장에 있다는 말을 믿고 식우 선생의 묘(墓)가 있는 충북 영동을 찾아갔다. 산줄기 끝자락에 문인석과 석등 그리고 비석과 함께 규모를 갖춘 봉분이다. 명당이라고 소문났는지 그 지덕(地德)을 입고자 뒤편으로 후대에 조성된 몇 기의 무덤까지 더해진 상태다.
묘소에서 자동차로 40분쯤 걸리는 충북 보은 땅에 있는 사당(祠堂)도 들렀다. 작은 면적에 키 높이 담장을 두른 소박한 세 칸짜리 건물이다. 무덤과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지만 핏줄에 대한 후학들의 배려가 느껴진다. 친형인 신미 대사의 부도(浮屠·사리탑)가 있는 법주사로 가는 길목인 까닭이다. 식우 선생은 형제간의 도타운 정(情)을 글 몇 편으로 남겼다.
"지난해 옷깃 여미며 헤어졌는데 어느 때 다시 뵐 수 있을지…"라는 시(詩)에선 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한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간경도감에서 형과 함께 일하는 기쁨도 얼마간 누렸다. 형이 열반한 이듬해 그도 흙으로 돌아간다. 앉아서 죽었다(坐脫)고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 여흥(驪興) 이씨는 황간 반야사(般若寺)에서 생을 마감했다. 만년에 몸을 사찰에 의지한 채 잠시 비구니로 살았다. 청상(靑孀) 시절에 남편이 불충불효죄로 파직(罷職) 당했지만 다행히도 친정아버지 배경 덕에 자식들의 벼슬길은 막히지 않았다. 여느 어머니처럼 그도 자나깨나 아들 걱정뿐이었다고 한다.
"내가 절집에 들어왔지만 아직도 너희에 대한 번뇌를 끊지 못했다"라는 말로 유언을 대신했다. 불교식으로 화장(火葬)해야 하지만 선영에 어머니를 매장했다. 유교 국가의 재상(宰相)으로서 불교 장례법을 따르려는 식우 김수온의 태도를 상하의 관료들이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식우 선생은 내 책이건 남의 책이건 가리지 않고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책 빌려주길 꺼렸다. 그가 자기 손에 들어온 책을 되돌려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읽는 습관도 특이했다. 한 장씩 뜯어 도포 자락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외웠고 외운 뒤에는 미련 없이 버렸다.
한 권을 외면 한 권이, 열 권을 외면 열 권이 길바닥으로 사라졌다. 집현전에 함께 살며 허물없는 사이인 신숙주(申叔舟)가 '고문선(古文選)'을 세종임금께 하사(下賜)받은 걸 알게 되었다. 애지중지하는 책을 빌려달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결국 자기 손에 넣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할 수 없이 김수온 집을 찾은 신숙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책은 뜯긴 채 사랑채 천장과 벽에 한 장 한 장 벽지처럼 발라 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을음까지 끼어 있는 상태이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어떤 자세로 있건 외우기 위해 붙여 두었다는 진지한 설명까지 들어야 했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표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책은 소유가 아니라 그 내용을 소화하고자 했다. 그야말로 물고기를 잡은 후에 통발을 버린다는 득어망전(得魚忘筌)의 태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에게 읽고 난 뒤의 책은 강을 건넌 후에 버려야 할 뗏목일 뿐이다.
'필요 없는 군더더기는 털어내고 닦아낸다'는 의미로 '식우(拭疣)'를 별호로 삼은 것도 그 연장선상이라 하겠다. 그래서 책이 귀하고 값이 만만찮은 시절임에도 이런 행동조차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에게 책의 용도는 다양했다. 때로는 평상에 깔아놓고 그 위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침상 바닥이 차가울 때 담요를 대신한 것이다. 신문지도 필요할 때 가끔 이불이 되는 법이다. 고정된 생각의 틀을 깨면 행동의 반경도 그만큼 넓어진다고나 할까.
"유학도 날 위함이요 불교도 날 위함이다(儒亦爲吾佛亦吾).
통달한 자가 어찌 석가와 노자의 영역을 구별하랴(達者寧分釋老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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