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간 한미 역사에서 이번처럼 미국의 안보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은 처음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 개발을 하다 들켜 미국 카터 대통령이 미군 철수로 응징하려 한 적이 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 "반미면 어때?"라고 충돌하다가 이라크전쟁 파병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꼬리를 내린 적은 있다.
이번 지소미아(GSOMIA) 때는 에스퍼 국방부 장관, 밀리 합참의장,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 랜들 슈라이버 인도·태평양 차관보 등이 총출동해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으나 답변 판박이였다. "안보상 신뢰할 수 없다는 일본과 정보 공유가 어렵다."
에스퍼 국방장관이 전시(戰時)나 위협 같은 극단의 용어를 동원해가면서 한국을 압박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미국이 아베를 굴복시켜 문제를 해결해주면 몰라도 GSOMIA 폐기는 그대로 간다는 것이다.
일본 측도 한국 청와대 회의를 보고 "수출규제 불변을 미국에 통보했다"고 선언했다.
지소미아는 23일 0시를 기해 운명을 다한다. 여기엔 문재인의 고집, 아베의 고집이 살벌하게 충돌한다. 둘 다 국내에서 선거판에 유리하게 이용해 먹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언론 분석도 있다.
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약간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보자.
2017년 10월 31일 대법원 판결로 징용공 배상 판결이 났다.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 재산을 압류해 배상금이 집행될 시점은 내년 초다. 일본은 대법원 판결은 한일청구권협정(1965년) 위반이므로 국제법을 어겼다며 징용공 배상 판결을 한국 스스로 해결하라고 했다.
이 문제만 갖고 양국이 절충했더라면 1차방정식으로 풀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아베는 대법원 판결 이전에 문 대통령이 위안부 협상을 무효화한 데서 열을 받아 있었으므로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금지, 화이트리스트 수출규제라는 보복 수단을 끌어들였다. 이제 2차방정식으로 좀 더 복잡해졌다.
한국은 역사 문제에 왜 경제로 보복하느냐고 WTO에 제소했다. 마침내 문재인정부는 판을 키워 GSOMIA 협정 종료라는 카드를 뽑아들었다.
미국을 끌어들여 이젠 3차방정식으로 더욱 난해해졌다.
지소미아는 2016년 11월 23일 박근혜정부 때 타결해 1년 단위로 운용하며 연장 여부를 90일 전 통보하도록 했는데, 문재인정부는 지난 8월 22일 '종료'를 선언하고 협상 종료일인 11월 23일까지 3개월 동안 암중모색을 거듭했다.
GSOMIA는 본래의 목적이 북한 핵·미사일 발사 정보를 한일 양국이 긴밀하게 공유하고 유사시에 대처하는데 TISA(한·미·일 정보공유협정)보다 유용하기 때문에 미국이 독촉해서 탄생했다. 원래 목적은 북핵 대응이었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용도도 변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미·중 간 무역전쟁이 터진 게 2018년이고 펜스 부통령은 2018년 10월 4일 역사적인 허드슨연구소 연설에서 중국을 패권을 다투는 적(敵)으로 규정했다.
이번에 에스퍼 국장장관이 문 대통령을 만나 "GSOMIA가 종료되면 득을 보른 나라는 중국과 북한"이라고 콕 집어 말했다.
전시 상황을 생각해보라고도 했는데 북한이 미국에 대들어 전쟁하겠는가. 타깃은 중국이다.
한국의 지소미아 파기는 중국을 포위하는 인도·태평양 구상에 끌려 들어가지 않겠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원초적으로 한·미·일 관계를 소용돌이로 빠뜨린 방아쇠는 대법원 판결이 당겼다.
대법원 판사들을 이념파들로 교체하지 않았더라면,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자제의 원칙'을 지켰더라면, 혹은 판결 자체를 늦췄더라면…. 지금 상황은 훨씬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문재인정부의 지소미아 카드는 어땠을까. 1)트럼프가 아베를 눌러줄 것으로 한국은 판단했을까.
미국은 분명히 no!라고 했다. 2)설사 트럼프가 압력을 가해도 아베가 수출규제 해제를 ok했을까.
이 작전을 세운 청와대 참모들은 1), 2)를 믿었을까?
만약 믿지 않았다면 지소미아 파기는 의도한 계략이 돼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일부 전직 장군들은 GSOMIA 폐기를 중국 편으로 뛰어들기 위한 작전으로 해석한다. 나는 그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 측에 약속한 3불(不) 정책도 주권국가를 포기한 것으로 말도 안된다고 말한다.
사실 중국, 북한 입장에서는 GSOMIA가 소프트웨어판 사드로 눈엣가시일 것이다.
아베의 수출규제 핑계로 지소미아가 사라진다면 에스퍼 국방관장 말대로 중국, 북한은 쌍수를 들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이제 한국에 잘해줄 것인가? 미국과 멀어진 한국은 전략적 가치가 떨어져 더욱더 찬밥이 될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문 대통령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한국을 이끌고 가겠다"고 했다. GSOMIA 파기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동맹이기 전에 세계 최강국 미국과 자유 진영에서 경제력 2위인 일본과 더욱 척지는 사태가 장차 어떤 파급효과를 부를지 이제부턴 그 점을 염려해야 할 차례다.
미국을 잘 아는 경제전문가들은 "지소미아 때문에 당장 한국을 골탕먹이진 않겠지만 여러 가지 불편한 점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한다.
당장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만나자고 했고 거기서 금강산 관광 재개를 논의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문 대통령이 잽싸게 끼어들어 유엔 제재 완화를 요청할 수도 있을 텐데 한미 관계가 순탄치 않다면 참여할 공간이 없다.
지소미아 폐기로 트럼프가 "한국은 빠져라"고 한다면 국제적으로 큰 신호를 보내게 될 것이다.
최근 한국을 찾는 해외 투자가나 경협 파트너들은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자주 한다.
"만약 철수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려 하는가?"라고 반문하면 "그럼 한국 투자는 결정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가장 염려하는 것은 컨트리 리스크(country risk)가 올라 한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경우다.
이것은 참으로 고약한 시나리오다. 미국이 자동차, 철강 관세 등으로 치사하게 보복(?)하지 않아도 시장이 알아서 한국을 처벌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그런 나쁜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미군 철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1차적으로는 당장의 방위비 협상과 직결된 사안이다.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정경택 국방장관과 회담 직후 에스퍼 장관은 "방위비를 상향한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우리 측과 견해차를 드러내 순탄치 않다.
범여권 국회의원 47인은 "갈 테면 가라는 각오로 협상에 임하라"는 성명을 냈는데 미국에선 "갈 테면 가라"는 말이 더 크게 들릴지 모르겠다.
미국이 방위비를 5배나 올려 50억달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거부당하기 위해 고안된 철수의 구실이라고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장은 말했다.
류제승 전국방부정책실장은 "주한미지상군은 9개월 단위로 5000~6000명을 순환 배치하는데 이때 장비를 그대로 둔 채 순환병을 안 보냄으로써 부분 철수를 단행할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주한미군 2만8500명 가운데 6000명을 줄여도 2만2500명이 주둔하므로 별문제 아니라고 치면 오산이라고 말한다. 실제 지상전투병력은 그게 전부이고 나머지는 다른 용도의 병력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부분 철수만 단행되고 한국의 컨트리 리스크는 올라가고 국가신용등급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그것이 금융이나 투자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100억달러를 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지소미아 파기는 경직성을 더 키울 게 뻔하다. 수출규제를 푸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다.
지소미아 파기가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사안이면 애당초 국회 동의를 받도록 설계됐어야 한다.
단 한 명의 국방, 외교 고위 관료가 "지소미아 파견은 안된다"고 문 대통령에게 직언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역사의 눈금에 새겨질 것이다.
[김세형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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