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백영옥의 말과 글] [141] 누구에게나 빨간 머리는 있다

바람아님 2020. 3. 22. 08:25

(조선일보 2020.03.21 백영옥 소설가)


"제 얼굴에 붉은 반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매우 어릴 때 레이저로 제거했는데, 그때 그들은 마취하는 것을

잊어버렸고 그때부터 저는 말더듬이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유명 가수 에드 시런별명은 생강이었다. 머리카락 색깔이 붉었기 때문이다.

빨간 머리 남자아이는 말까지 더듬었다. 또래 친구들의 놀림이 계속될수록 말 더듬는 증세는 심해졌다.

에드 시런을 볼 때마다 나는 홍당무라고 놀림받았던 빨간 머리 앤을 떠올리곤 했다.

생강과 홍당무 사이에는 수많은 말줄임표가 있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빨간 머리는 있다. 거울 속 빨간 머리를 바라보며 이렇게 살기 싫다고 느낀 순간이 소년에게도 있었다.

그때 다가온 건 음악이었다. 그는 말더듬증을 고치기 위해 에미넘의 랩을 따라 불렀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빠르고 정확한 가사를 들으며 어눌한 발음을 교정했다. 부르고 또 부르는 일은 4년 동안

길거리 공연에서 계속됐다. 누가 듣든 안 듣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유별나거나 이상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당신보다 더 나은 당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없거든요."


에드 시런의 많은 히트곡에 붙은 댓글 중 여전히 나를 놀라게 하는 건 그의 더벅머리가 사랑스럽고,

그의 빨간 머리가 너무 귀엽다는 말이다. 사실 그의 외모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그러니 생강이 장미가 된 기적이 생긴 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뿐이다.

이쯤에서 나는 아픈 과거도 끝내 바뀔 수 있다는 걸 있는 힘껏 믿어보고 싶다.


지난주, 미스터트롯 결선에서 어린 시절 사고로 얼굴에 남은 상처를 가리키며 "엄마, 내 얼굴엔 나이키가 있어!"라고

말하던 소년이 자라 우승자가 되었다. 승리의 여신을 뜻하는 나이키(니케)가 그려진 한 남자의 상처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아픈 과거 역시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20/20200320054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