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4.25 백영옥 소설가)며칠 전 서재를 정리하다가 새삼 눈에 띄는 책을 발견했다.
'내 방 여행하는 법.' 처음 읽었을 때는 광적인 여행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여행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 말하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은 프랑스혁명이 몰아치던 1794년에 쓰인 것으로, 불법적인 결투 때문에
42일 동안 가택 연금을 당한 한 귀족이 방 안 풍경에서 얻은 영감을 그려낸 단상이었다.
많은 사람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해 얘기한다. 예측은커녕 대응하기에도 바쁜 지금이지만
분명해 보이는 건, 우리는 이제 코로나 이전으로 완벽히 돌아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원치 않아도 공유 경제에 대한
인식이 바뀔 것이고, 언택트(Untact) 사회로의 빠른 진입으로 일상에 대한 정의도 달라질 것이다.
'내 방 여행하는 법'이 이전보다 더 새롭게 보인 건 그 순간이었다.
격리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많아진 요즘 떠날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남은 유일한 곳이 '내 방'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낭만적인 에펠탑 아래 잔디밭이나 만리장성에서 수천 명의 관광객에 치이고,
에어컨이 고장 난 인도의 호텔에서 김빠진 맥주를 마시다 보면, 내 침대에서 드라마를 보며 치킨을 먹는 나를
상상하며 뒤늦게 깨달을 때도 잦다. "아! 내가 진짜 원했던 건 내 침대였구나."
책을 읽은 후, 나는 백작처럼 방에 걸린 사진과 거울에 비친 나를 살펴봤다.
소파와 탁자를 지나 산책하듯 거실을 걸었다.
이전보다 확실히 보이는 것 중에 잎사귀 끝이 갈라지기 시작한 벤저민과 오래된 책상의 닳아빠진 모퉁이가 있었다.
뾰족하고 날카롭던 책상 모퉁이는 사포로 문질러 놓아 순하게 둥글어져 있었다.
조심성 없는 아내가 모서리에 긁힐 걸 염려해 취한 남편의 조치였다.
나는 책상을 오래 바라보다가 뭉툭한 모서리를 만졌다. 머물든 떠나든 그곳이 어디든 이곳의 인생이 소중한 것이다.
지금의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아는 순간 기적처럼 감사함이 찾아든다.
카프카도 말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라고.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5/20200425000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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