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12.22 안용현 베이징 특파원)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의 고향에는 각각 '마오쩌둥 도서관'과 '덩샤오핑 도서관'이 있다.도서관 성격은 판이하다. 마오 도서관은 마오가 쓴 책이나 어록집, 즐겨 읽던 책들을 전시한 공간이다. 반면 덩 도서관은 동네 학생과 주민이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실용적 장소다.
마오 고향인 후난성 샹탄(湘潭)현에는 높이 10.1m의 마오 동상이 대리석 광장에 서 있다.
마오 고향인 후난성 샹탄(湘潭)현에는 높이 10.1m의 마오 동상이 대리석 광장에 서 있다.
'마오 순례객'들은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동상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마오 기념관 입구에선 "동방이 붉어지고 태양이 솟는다"로 시작하는 마오 찬양가(동방홍·東方紅)가
관람객을 맞는다. 기념관에는 마오를 우상화하는 자료가 빼곡하다.
반면 쓰촨성 광안(廣安)현에 있는 덩샤오핑 기념관 주변은 수목이 울창하다.
평소 "나무를 많이 심으라"는 덩의 지시에 따라 당·정부 기관과 지방정부가 기념관 부지에
각자 이름으로 숲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념관은 가족 나들이 코스가 됐다.
앉아서 미소 짓는 덩의 동상 높이도 2m 남짓이다.
반공(反共) 교육을 받은 한국의 세대에게 6·25전쟁 당시 중공군을 파병한 마오는 '비호감' 인물이다.
반공(反共) 교육을 받은 한국의 세대에게 6·25전쟁 당시 중공군을 파병한 마오는 '비호감' 인물이다.
김일성·스탈린과 더불어 무찔러야 할 공산당이었다. 반면 개혁·개방으로 중국을 발전시킨 덩샤오핑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마오와 덩의 기념관을 둘러봐도 덩에게 더 점수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중국인의 평가는 다르다. "마오가 없었다면 덩도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중국인의 평가는 다르다. "마오가 없었다면 덩도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마오 동상 앞에 놓인 화환에는 마오 얼굴이 새겨진 100위안짜리 지폐와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쪽지가 같이 꽂혀 있다.
그러나 실제 중국을 부자로 만든 덩의 동상 앞에는 이런 화환이 없다. 중국에는 마오 초상화를 걸어둔 택시도 쉽게 볼 수 있다.
기사들은 '마오가 화(禍)를 피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마오는 '반신(半神)'으로 승격된 반면, 덩은 '인간 지도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이 든 중국 전문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사자성어보다 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있다.
나이 든 중국 전문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사자성어보다 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있다.
수시로 튀어나오는 '마오 어록'이다. 1960~70년대 성경처럼 외운 마오의 말씀이 그들의 언어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마오가 주도한 문화대혁명(1966~ 1976년)의 광풍은 현대 중국인의 사고·감정·역사관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을 다시 만난 것은 '덩샤오핑 시대'부터다. 6·25전쟁 이후 중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직접 보고 겪은
한국인은 사실상 없다. 한·중 관계에서 '마오쩌둥 시대'가 고스란히 빠져버린 셈이다.
이 공백은 중국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이 공백은 중국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덩샤오핑 시대만 체험한 우리에게 반(反)부패를 한다며 문화대혁명의 유물인 '자아비판'을 꺼내 드는 중국은
이상한 나라일 수 있다. 성탄절보다 성탄절 다음 날인 마오 생일(26일)에 더 열광하며 그의 고향이나 동상을 찾아
"메리 마오"를 외치는 중국이 기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을 알려면 '마오 시대'를 빼놓을 수 없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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