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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다 주고 쓰러지니 전화번호 바꿔 이사 간 자식들

바람아님 2018. 12. 25. 09:29

[중앙일보] 2018.12.23 07:01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2)
희망과 절망은 한 몸이고,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는 절망의 조건이 많아도 끝까지 희망을 바라보고, 누구는 희망의 조건이 많아도 절망에 빠져 세상을 산다. 그대 마음은 지금 어느 쪽을 향해 있는가? 우리는 매 순간 무의식 속에 희망과 절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은 눈금 하나 차이지만, 뒤따라오는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희망도 습관이다. 절망을 극복하게 만드는 희망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대 원동력이다. 그동안 길 위에서 본 무수한 절망과 희망을 들려드린다. <편집자>
 
벽에 걸린 2018년 12월 달력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같다. 연말이라 그런지 한 해가 가기 전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자고 가족들이나 지인들 모임도 잦다. 창밖을 보면 겨울바람에 앙상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를 보면 나는 종종 쓸쓸해진다. 오래전 내가 만났던 어느 노부부의 사연이 나무를 보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한 주에 두 번씩 트럭에 과일을 싣고 용인으로 장사를 다니던 어느 봄날이었다. 이동 낚시터 근처로 장사를 갔다가 우연히 어떤 노부부를 보았다. 노부부는 항상 마을 느티나무 아래 앉아있었다.
 
과일을 싣고 용인으로 장사를 다니던 어느 날 어떤 노부부를 보았다. 노부부는 항상 마을 느티나무 아래 앉아있었다(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과일을 싣고 용인으로 장사를 다니던 어느 날 어떤 노부부를 보았다. 노부부는 항상 마을 느티나무 아래 앉아있었다(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그날도 마을회관 느티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과일 사라고 방송을 틀었다. 그때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손가락으로 한 집을 가리키시며, 할망구가 혼자 있을 테니 그 집에 딸기 한 바구니 가져다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나는 딸기를 들고 그 집으로 갔다. 낡은 대문 입구로 들어서니 바싹 말라죽은 화분과 녹슨 농기구들이 어수선했다.
 
“계세요?” 한참 뒤 힘겹게 방문이 열렸다. “뉘시유?” “과일 장수인데요. 어느 노신사분이 딸기 가져다 드리라고 하시던데요?” 할머니는 손으로 바닥을 밀며 문 쪽으로 가까이 오셨다. “보다시피 내가 병신이라 걷지를 못해. 우리 집 양반이 읍내 나가면서 보냈나 보네.” 그 모습을 본 나는 딸기를 싱크대로 가져가 깨끗이 씻어 앞에 놓아 드렸다. “할머니, 심심할 때 잡수세요.”
 
처음 두 분과 그렇게 인연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장사를 마치고 그 집에 잠깐씩 들렀다. 언제부턴가 두 분은 내가 그곳에 장사 가는 요일만 손꼽아 기다린다고 하셨다. “할아버지, 앞으로 제 과일은 별도로 사지 마세요. 그 대신 제가 가끔 뵙고 갈게요. 제가 올 때마다 과일을 사시면 두 분이 너무 부담돼서 제가 불편해요” 했더니 “알았으니 잠깐씩 들러 커피라도 마시고 가요. 자식 같아서 그래” 하셨다.
 
할아버지 부탁으로 딸기 한 바구니를 집에 가져다 드렸다. 집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가 계셨다. 나는 가져간 딸기를 씻어 앞에 놓아 드렸다. [중앙포토]

할아버지 부탁으로 딸기 한 바구니를 집에 가져다 드렸다. 집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가 계셨다. 나는 가져간 딸기를 씻어 앞에 놓아 드렸다. [중앙포토]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봄볕이 드는 마루에 앉아 속사정을 털어놓으셨다.
“아기 엄마, 우리 집 양반은 평생 농사꾼으로 살았어. 힘든 삶이었지만 착실하게 살아오는 동안 자식 사 남매 시집·장가들이고 작지만 노후에 쓸 돈까지 조금 남더군…. 그 거면 저승 갈 때까지 애들한테 짐은 안 되겠거니 생각했지.”
 
나는 노점장사로 검게 그을린 손으로 그 할머니 손을 가만 잡아드렸다. 할머니가 가늘게 한숨을 쉬시더니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후 아들놈이 사업한다고 몇 푼, 사위가 점포 확장한다며 몇 푼, 막내가 아파트 늘려간대서 또 보태고. 그 양반 인생이랑 바꿔온 이 논 저 논 다 팔았지만, 아깝지 않았어. 늘 더 못 주는 게 미안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들었다.
“세월이 가면서 논은 다 남의 손에 넘어갔고 빈손이 되었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놈들은 점점 소식이 뜸해지더군. 내가 이 꼴로 쓰러졌을 때 다급히 전화해보니 한 놈도 연락이 안 되지 뭐야. 내가 쓰러진 그 날 우리 두 늙은이는 병실에서 밤새 울었지. 한날에 목숨을 끊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놈들도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소식 올 때만 기다리며 살고 있어. 아침 먹고 느티나무 아래 앉아 자식 놈들 기다리다 해 떨어지면 하루를 접는 게 일이 돼버렸지…. 
 
그런데 그 후 알게 되었다우. 자식 놈들 모두 전화번호를 의도적으로 바꾸고 이사 가버린 사실을 말이야. 이런 기막힌 내 사정을 세상 누가 믿겠나? 아마 다 거짓말이라 할지도 몰라. 이제 우리 두 늙은이는 자식들을 찾지 않기로 했다우. 다만, 그놈들이 행여 마음이 변해 우리 두 늙은이를 찾아주려나 해서 이렇게 이사도 못 가고 있다우.”
 
할머니는 눈물을 훔쳤다. 밤중에 집으로 돌아와 차에서 내려서는데, 어린 두 남매가 나를 반겼다. “엄마, 카네이션 사러 언제 갈 거야?” 생각해보니 어버이날이 내일이었다. 나는 두 녀석과 꽃을 사러 가면서 용인의 두 분이 생각났다. 그 집에는 오늘도 내일도 카네이션은 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버이날, 나는 노부부의 집을 찾았다. 두 분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더니 기뻐 웃으시는데 슬퍼 보였다. 그분들이 낳고 기른 사 남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중앙포토]

어버이날, 나는 노부부의 집을 찾았다. 두 분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더니 기뻐 웃으시는데 슬퍼 보였다. 그분들이 낳고 기른 사 남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중앙포토]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부모님께 들러 꽃을 달아드리고, 카네이션 두 개를 더 사서 용인으로 트럭을 몰았다. 웬일인지 느티나무 아래 계셔야 할 두 분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른 그 집으로 가 보았다. 기척이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대문을 밀며 들어갔다.
 
“할머니, 할아버지 저 왔어요.”
“아요, 아기 엄마 왔네. 어서 와. 우리 두 늙은이가 병이 나 누워있네그려.”
하필 어버이날, 두 분은 자리에 누워계셨다. 마음이 먼저 탈이 나신 게 틀림없었다.
 
“어버이날이에요. 축하드려요. 얼른 건강 찾으세요.”
두 분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더니 기뻐 웃으시는데 슬퍼 보였다. 그분들이 낳고 기른 사 남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주일 후 그 마을에 장사하러 다시 찾아갔다. 두 분은 느티나무 아래서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셨다. 기약 없는 기다림의 슬픔을 감추고 밝게 웃으시며, 감기는 이제 다 나았다고 하셨다. 두 분 드시라고 과일 봉지를 건네 드리고 차를 돌리는데 두 분 가슴엔 아직도 내가 드린 카네이션이 달려있었다.
 
나는 평택 쪽으로 화물차를 몰면서 백미러 속으로 멀어져가는 두 노인을 봤다. 두 분의 애타는 기다림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빌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직업이 바뀌었고 핸드폰도 분실해 그분들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지금쯤 소식 끊었던 자식들 연락은 오는지 궁금하다.
 
김명희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