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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23] 전후 처리 방안

바람아님 2013. 12. 8. 10:36

(출처-조선일보 2011.08.12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연합국들은 전후 처리 방안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두 번씩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잔혹한 대량학살을 자행한 독일에 대해서는 강경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연합국 지도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1944년 9월, 캐나다의 퀘벡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총리가 만났을 때 미국의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는 독일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할 방안을 준비해 왔다. '모겐소 계획'이라 불리는 이 방안은 우선 독일을 둘로 분단시키고, 루르, 자르, 상부 슐레지엔 등 주요 광공업 지역들을 주변국들이 공동 관리하는 가운데 독일의 공업 기반을 완전히 해체한다는 것이었다. 이 안에 따르면 이후 독일은 영세 농업국이 될 운명이었다. 모겐소의 표현에 의하면 독일인들은 이제 "아침에도 수프, 점심에도 수프, 저녁에도 수프만 먹을 것이다." 처칠은 마지못해 찬성했지만, 이 안에 대한 여론이 너무 안 좋아서 결국 미국 측이 스스로 폐기했다.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는 소련 역시 독일에 대한 가혹한 복수를 요구했다. 소련 외교관 마이스키는 독일의 중공업을 80% 감축하고, 공장과 기계 등 독일 자산을 소련으로 보내야 하며, 독일에 200억달러의 배상금을 물리고 그 절반을 소련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말이 마차를 끌게 하려면 건초는 주어야 할 거 아니오" 하고 그를 말렸다. 그러나 그 후 소련군이 베를린 지역을 단독 점령했던 두 달 동안 실제로 소련군은 그들이 나치들에게 당했던 만큼 가혹한 복수를 감행했다. 여자들을 강간하고, 남자들은 강제노동에 동원하거나 소련으로 끌고 갔으며, 거의 모든 기계를 뜯어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거 테헤란 회담(1943년 11월)에서 스탈린이 말했던 것을 그대로 실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스탈린은 독일이 두 번 다시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려면 장교와 기술자 5만 명만 총살하면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당시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이 이 말을 농담으로 한 건지 진심으로 한 건지 서로 의견이 갈렸다고 한다.

이런 복수와 응징의 계획이 수정된 이유는 전후 냉전 상황에서 서독을 부흥시켜 소련 중심의 공산권에 맞서게 할 필요 때문이다. 대개 가혹한 전후처리 방안이 다음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는 점을 놓고 보면 결과적으로는 온건한 방안이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