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한 지 석 달도 안 된 2003년 5월 21일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더 큰 위기들이 닥쳤다.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그 역풍으로 총선에서 압승했지만, 국정은 잘 풀리지 않았다. 야당에 연정(聯政)을 제안할 정도로 늪에 빠졌다. 노 전 대통령이 명분만 있으면 그만두겠다고 해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이 원로들을 동원해 말렸다.
사실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를 처음 맞은 노태우 정부 때 정치가 가장 활발했다. 광주 민주화운동 청문회, 5공 비리 청문회가 열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냈다. 합의 처리된 법안도 가장 많았다. 군사정부의 연장이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낮은 자세로 정치를 풀어 갔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것이다.
선거를 치를 때와 대통령이 되어서는 다르다. 선거 때는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다. 상대가 무너지면 내가 유리하다. 그렇지만 당선된 뒤에는 다르다. 임기 중에 내가 원하는 국정 성과를 거두는 게 중요하다. 상대를 무너뜨리면 국정을 끌고 가는 데 방해만 된다. 상대에게 도움을 주고, 국정에 협조를 받는 게 효과적이다. ‘제로 섬 게임’이 아닌 ‘윈 윈 게임’이다.
물론 끌려만 다니다가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 결단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 강력한 여론의 지지를 얻어야 가능한 데다 한 번 쓸 때마다 큰 내상(內傷)을 각오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참여정부 조각(組閣) 이야기를 이렇게 썼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때 개혁적 인사들이 한두 명씩 내각이나 청와대에 발탁됐다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오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 나는 개혁적 인사들이 일거에 내각과 청와대의 대세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문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 윤영관 외교부 장관을 파격 발탁했지만 “장관이 된 후 외교부 관료들의 강고한 벽에 둘러싸였는지 기대만큼 개혁적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당찬’ 강금실 전 법무장관을 기용했지만 검찰 개혁도 실패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검찰을 장악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 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고 썼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개혁적 인사들이 대세를 장악하도록 밀어붙이고 있다. 그는 김두관 전 행자부장관이 사퇴하도록 몰고 간 야당에 대해 “우리 사회 기득권자들의 횡포가 그와 같았다”고 말했다.
지금 문 대통령의 인사에 대한 비판도 ‘기득권자들의 횡포’라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완고한 이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양이 아니라 성공이다. 문 대통령의 기억처럼 인사의 상징성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가장 상징적이었던 외교·법무에서 개혁이 실패했다. 특정인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목표가 돼선 곤란하다. 중요한 건 개혁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야당을 달래야 한다. 아무리 여론의 지지가 높아도 국회는 여소야대다. 야당이 반대해도 장관은 임명할 수 있다. 하지만 법률안이나 예산안, 특히 추경안은 다른 문제다. 야당이 발목을 잡는다고 비난할 수 있어도 결국 국정의 최종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문제를 풀어갈 책임도 떠안고 있다는 말이다.
당선 직후 문 대통령은 국회를 찾았다. 일일이 야당 대표를 만나 협조를 부탁했다. 직접 기자들 앞에 나와 설명했다. 그런데 청와대에 들어간 뒤 달라졌다. 공직 배제 5원칙에 대한 해명도 비서관 회의에서 했다. 해명 방식을 까다롭게 따지고, 대국민 설명에 인색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여당의 한 3선 중진 의원은 “문 대통령이 이낙연 총리를 발표하기 전에 야당에 미리 양해를 구했으면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직 배제 5원칙도 문 대통령이 제시한 것 아니냐. 그러면 직접 나서서 사과하고, ‘첫 내각은 시간이 없으니 양해해 주면 다음부터 엄격히 적용하겠다’고 말하면 국민들도 이해하지 않겠느냐”고 아쉬워했다.
그런 기대와는 영 다른 방향으로 정국이 흘러가고 있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국회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데 참고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문 대통령은 “장관 인사는 대통령의 권한”이라며 “야당도 국민의 판단을 존중해주시길 바란다”고 훈계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제시한 기준인데 해명이 아니라 비난이라니. 권력자가 역사와 마주하고 국민을 상대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물론 현재의 인사청문회 방식엔 문제가 있다. 공직 후보자로서 자질과 능력 검증에 주안점을 둬야 할 청문회가 사생활에 현미경 들이대고 티끌까지 낱낱이 들춰내는 흠집내기식 정치 공세로 흐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불법 혼인신고 논란 끝에 결국 자진 사퇴하긴 했지만 안경환 전 법무장관 후보자의 경우도 검증이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을 수 있다. 청와대는 안 교수가 이혼하면서 첫 부인이 쉽게 재혼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처녀성을 중시하던 시절이다. 상대 여성의 가정이 파괴될 수도 있으니 공개적으로 떠들 수도 없고, 그 여성이 이제와 인정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별도의 검증기관이 엄정하게 거르고, 국회는 그 보고를 받는 방식으로 바꿔 청문회의 격을 높여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절차다. 우선은 공약으로 내건 문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가혹하게 몰아붙인 민주당이 야당을 설득해 풀어야 한다. 사과할 것을 공격으로 넘기는 일이 한 번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비책(秘策)은 위기 때를 위해 아껴 둬야 한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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