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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0] 도요토미家의 멸망은 인과응보?

바람아님 2018. 3. 23. 06:20

(조선일보 2018.03.23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조선 침공을 감행한다.

이때 분에이 세이칸(文英淸韓)이라는 승려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종군 사관(史官)으로 조선에 왔다.

그는 가토를 따라다니며 그의 혁혁한 전과(戰果)를 칭송하는 기록을 남겼다.

한시 등에 능했던 그는 1614년, 히데요시의 승계자 히데요리(秀頼)의 명으로 제작되던 교토 호코지(方廣寺)의

범종에 새길 명문(銘文) 제자(題字)를 의뢰받는다. 세이칸은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이라는

문구를 범종에 새겼는데, 이 문구가 평지풍파를 불러일으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국가안강'이 피휘(避諱·군주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피하는 예법)에 어긋나며,

'家'와 '康'을 찢어놓은 것은 더더욱 불경스럽다는 점과 함께 '군신풍락'이 도요토미(豊臣)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들어, 문구에 담긴 저의를 히데요리 측에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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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에게 이런 해석을 제공한 것은 쇼군의 고문(顧問) 하야시 라잔(林羅山)이었다.

라잔은 퇴계와 율곡의 이기론(理氣論)에 큰 영향을 받은 주자학자로, 주자학이 막부의 관학이 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라잔은 범종 문구가 이에야스에 대한 불온한 뜻을 담고 있음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이를 묵과해선 안 된다고 이에야스에게 간언했다.


이에야스에게 불려간 세이칸이 쇼군가의 번영을 축원하는 의미라고 극구 해명했으나, 이에야스의 의심과 괘씸함은

풀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 문제를 계기로 살얼음판을 걷던 도쿠가와가(家)와 도요토미가의 화친은 결렬되고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 일로로 치닫게 된다. 이윽고 이에야스가 응징에 나서자 전력상 열세였던 도요토미가는

패하고 멸문(滅門)을 당했다. 조선 침공에 부역한 승려의 글재주가 조선 학문을 흠모한 유학자의 비판을 받아

도요토미가 멸망의 단초가 됐으니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