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5.11. 04:01
밴에서 1년 살아보기.. 창밖 풍경 매일 바뀌는 집
은퇴 부부의 여가 생활.. 낚싯대·자전거 싣고 주말마다 캠핑카 여행
싱글족의 힐링 여행.. 산이나 바닷가에 주차, 바람·파도소리로 휴식
안전 신경쓰자.. 초보자, 노지 차박은 위험
호텔의 안락함을 포기하면 여행이 한결 재밌다. 펜션이나 민박 얘기가 아니다. 조금 더 자연에 밀착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캠핑은 번거롭다. 그럴 때 차박(車泊)이 있다. 말 그대로 자동차 안에서 자는 것이다. 캠핑카나 SUV, RV를 몰고 가면 좋겠지만 하룻밤쯤 일반 승용차라도 괜찮다. 아주 색다르다.
강원 강릉시 왕산면 해발 1100m의 '구름 위 마을'로 불리는 안반데기 마을에서 요즘 유행이라는 차박을 했다. 안반데기 마을은 '차박러(차박을 즐기는 사람들)'와 백패킹 족(최소한의 장비만 챙겨 다니는 캠핑족) 사이에서 소문난 차박 명소다. 운이 좋으면 밤하늘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지난 4일 안반데기 마을로 갔다.
떡 치는 나무받침 '안반'처럼 우묵하면서 넓적한 지형이 험준한 백두대간 줄기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 안반데기(안반덕의 강릉 사투리)는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사는 가장 높은 지대로 알려져 있다. 피덕령을 중심으로 옥녀봉과 고루포기산을 좌우에 두고 195.5㏊ 농경지가 탁 트인 곳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하얀 풍력발전기는 어느 쪽에서 보든 감탄할 만했다. 문제는 숙소였다. 안반데기 마을 유일한 민박은 연휴를 앞두고 이미 예약 마감이었다. 은하수를 보려면 차박은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했다.
차박지는 강릉 시내와 동해 일출 조망 명소인 멍에전망대 부근 임시 주차장으로 정했다. "낮엔 농사 장비나 차량이 세워져 있지만 해 질 녘부터는 공터여서 밤엔 주차해도 괜찮다"는 안반데기 마을 고랭지농촌문화관 '와우! 안반데기' 운유쉼터 카페지기의 말에 조용히 다녀가기로 약속하고 자리를 잡았다. 알음알음 소문난 곳답게 해가 질 무렵이 되니 차들이 두서너 대 모여들었다. 모두 차박을 하려는 차량이었다. 개중엔 차박이 쉽도록 트렁크가 넓고 뒷좌석을 접을 수 있는 SUV나 RV가 아닌 일반 승용차도 보였다. 해 떨어지기 전 RV 뒷좌석을 접어 트렁크를 평평하게 한 뒤 침낭을 펴 '트렁크 침실'을 꾸며놓았다. 몸을 겨우 누일 만한 차내 침실은 다락방처럼 아늑했다. 은하수를 기다리는 동안 간단한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오후 8시쯤 되니 주변은 온통 어둠으로 휩싸였다. 그제야 밤하늘에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존재를 드러냈다. 고요 속에 잔잔한 음악을 틀고 팔을 뻗어 선루프를 여니 우주의 한 조각이 네모난 프레임에 걸렸다. 화가 김환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연상시키는 별밤 하늘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선루프로 들어오는 알싸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미세먼지에 찌든 몸을 심폐 소생시켰다. 당장의 할 일보다 잊고 지냈던 버킷리스트가 한 줄 한 줄 되살아나는 밤. 몇몇 사람들은 차 밖으로 나와 멍에전망대에서 밤하늘과 강릉 시내 야경을 감상했다. 다만 은하수를 보겠다는 계획은 밝은 달이 떠오름과 동시에 접어야 했다. 밤새 바람을 가르는 풍력발전기 프로펠러 소리, 침낭과 패딩을 스멀스멀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이따금 뒤척였지만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니 동쪽 능선 너머 해가 새벽을 걷어내고 있었다. 트렁크를 동쪽으로 향하게 차를 다시 세우니 아침 해가 침실로 룸서비스 됐다. 구름 위 마을을 발아래 두고 드립백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신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안반데기 마을에서 체크아웃한 뒤 바다 전망 또 다른 차박 명소 순긋해변으로 향했다. 공용 화장실에 한번 가려면 자동차로 3분을 움직여야 했고 조식 뷔페는 없었지만 하룻밤 만에 깨달았다. 스위트룸은 해발 1100m 위에도 있다는 사실을.
“여행하듯 살고 싶었고, 살듯이 여행하고 싶었어요. 창밖 풍경이 매일 바뀌는 집에서 산다는 건 축복이었죠.”
‘여행하는 집, 밴라이프’의 저자 김모아(36)·허남훈(36) 부부는 작년 3월부터 1년간 ‘움직이는 집’ 밴을 타고 다니며 일년 살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부부의 본업은 뮤직비디오 감독과 CF 스토리텔링 작가. 1년 동안 부부는 노트북을 들고 우리나라 곳곳을 파고들어가 밴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달리다 졸리면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이, 어떤 날엔 전통시장 부근 주차장이 집터가 됐다. 바다가 보고 싶은 날엔 바다를 마당 삼아 밤을 보냈다. 이들 부부는 “밴에서 살아보니 안락한 집보다 불편했던 게 사실이지만, 매일 집터와 마당을 선택하며 살 수 있다는 게 밴 라이프인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밴을 포함해 차에서 먹고 자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웃도어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를 장식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 일이다. 3년 전쯤부터는 낚시, 등산 등 아웃도어 활동이 취미인 남성들이 텐트를 치지 않고 야영하는 비바크(Biwak·통상 ‘비박’이라 칭함)가 차에서 숙박하는 차박(車泊)으로 진화했다. 텐트를 치고 캠핑하던 사람들이 수고를 줄이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차 위에 루프톱 텐트를 설치하거나 캠핑카를 대여 또는 구입하는 일이 잦아졌다. SUV ·RV의 트렁크를 활용한 ‘트렁크 캠핑족’도 늘어나며 차박이 새로운 여행 숙박 형태로 떠올랐다. TV에선 차박 관련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인스타그램엔 수많은 피드가 ‘#차박’이란 이름으로 올라와 있다. 차박의 한 형태인 밴을 타고 여행하는 밴라이프(#vanlife)란 해시 태그로 검색하면 세계 곳곳에서 캠핑카나 캠핑카로 개조한 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의 사진이 300만 건에 육박한다. 한국레저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카라반 인구는 올해 1만명을 넘어섰다.
차박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수도 눈에 띄게 늘었다. 2014년 개설된 네이버 차박 커뮤니티 ‘차박캠핑클럽’엔 5월 현재 회원 3만6500명이 가입돼 있다. 차박캠핑클럽 운영자 남후식(45)씨는 “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 요즘엔 하루 평균 30여 명이 새로 회원으로 가입한다”고 했다. 차에서 먹고 자며 유랑하듯 여행하는 게 더는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세상이다.
기동성 있는 여행으로 인기
방산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한익환(29)씨는 작년 가을부터 자신의 스포티지를 이용해 주말에 차박캠핑을 다닌다. 캠핑 테이블과 미니 버너 등만 챙겨 캠핑식을 해먹고 잠은 차에서 잔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숙박 예약마저도 사치처럼 느껴진다”는 그는 애초 주말마다 숙박 예약에 대한 부담감 대신 텐트 하나만 있으면 잠자리가 해결되는 캠핑을 해왔다. 몇 년 동안 캠핑을 하다 보니 텐트를 치고 걷는 시간도 아까워져 아예 차에서 자기로 했다. “차박이 가능한 SUV나 RV들은 뒷좌석을 접어 트렁크 공간을 확보한 뒤 폭신한 에어매트를 깔고 침낭을 펼치면 침실로 변해요. 차로 숙박을 해결하니 캠핑의 질이 달라졌어요. 그만큼 자연을 감상할 시간이 늘었죠.”
파주에 사는 전소영(28)씨 가족은 차박이 가능한 RV 트렁크 공간을 활용해 차박을 즐긴다. 작년 결혼기념일 여행으로 남해에 가다 차 안에서 하룻밤을 잔 게 차박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전씨는 “네 살과 일곱 살 아이들이 있어 장거리 여행은 주로 아이들이 자는 시간대에 이동하는데, 차에서 자는 게 생각보다 편했고 아이들도 좋아하더라”고 했다. 제대로 차박 라이프를 즐기기 위해 차도 스포티지에서 카니발로 바꿨다. 4년 차 캠퍼인 전씨 역시 “캠핑을 오래 하다 보니 텐트 치고 철수하는 시간이 아까웠다”며 “차박을 하면서 시간과 숙박비를 줄였을 뿐 아니라 기동성이 좋아져 특별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로든 움직이기 쉬워졌다”며 웃었다.
싱글도 은퇴자도 다 함께 ‘차차차박’
국내 차박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긴 어렵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4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차박이란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3~4년 전에 비해 세대층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 차박캠핑클럽 남후식씨도 “커뮤니티 개설 초기엔 회원 대다수가 젊은 층 위주였는데 최근 들어 중·장년층과 은퇴 세대들의 가입이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캠핑카도 마찬가지다. 카라반 전문 매거진인 격월간 ‘더 카라반’의 권민재(46) 편집장은 “밴라이프는 해외의 경우 노년층 여가 활동에서 젊은 층 여가 활동으로 확대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젊은 층의 여가 활동에서 최근 은퇴 세대를 포함한 중·장년과 노년층 여가 활동으로 확대되는 추세”라고 전했다.
대전 대덕구에 사는 김세웅(62)씨는 아내와 함께 한 달 4~5회 자전거와 낚싯대를 싣고 캠핑카로 여행한다. 한국전력에서 36년 일하며 주말마다 여행을 하다 퇴직 후 본격적으로 캠핑카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김씨가 캠핑카 여행을 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계획과 동시에 원하는 여행지로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날로그 세대인 그는 “인터넷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지 못하니 가고 싶은 곳의 숙소 정보를 얻거나 예약이 쉽지 않았다”며 “캠핑카는 그런 고민 없이 맘만 먹으면 어디나 갈 수 있어서 편했다”고 했다. “예전엔 캠핑카 여행이 고급 취미로 여겨졌는데 요즘 비슷한 연배들끼리 차 끌고 모여 ‘번개 모임’도 합니다.”
혼자 여행을 즐기는 ‘혼여족’에게도 차박이 인기다. 조용히 사색하고 싶거나 쉬고 싶을 때 차는 외부로부터 보호해주며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영상제작사 ‘모든팩토리’를 운영하는 싱글남 유재현(30)씨는 “가끔 집을 나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절실한데 자발적 고립 상태가 될 수 있는 차박이야말로 힐링”이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차박을 한다”고 했다. “차가 닿을 수 있는 높은 산이나 바닷가에 주차하고 가만히 있으면 천연 그대로의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귀와 함께 뇌가 정화되는 기분이 들면서 긴장이 풀리죠. 대인관계가 피곤할 때 나 홀로 차박을 하지만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사람이 그리워지는 경험은 혼자 차박을 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차박 여행을 한다고 꼭 멀리 떠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백화점 매니저인 신동웅(32)씨는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한강 차박’ 사진을 올렸다. ‘근로자의 날에도 열심히 일한 나를 위해 선물하는 의미에서 한강으로 차박을 나왔다’고 밝힌 신씨는 한강의 야경을 감상하며 치맥을 즐긴 뒤 차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데 다음 날 출근해야 할 땐 가끔 잠실한강공원으로 가 차박을 한다”는 신씨는 “잠깐이나마 한강에서 캠핑하는 기분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했다.
차박, 알고 해야 안전
차박을 즐기는 사람들은 “차는 그 어떤 숙소보다 자연과 가까이 대면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연보호와 안전을 강조한다. 남후식씨는 “차박의 슬로건은 ‘머무는 곳은 처음처럼’”이라며 “일부 차박족의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 화로대 없이 불 피우기, 오·폐수 무단 방출로 자연이 훼손돼 차박족 사이에서도 자연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차박을 위해 차를 불법으로 개조하거나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 차박을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법자가 될 수 있다. 차박 마니아 김세웅씨 역시 “든 자리, 난 자리 티 안 나게 다녀가는 게 차박의 기본”이라고 덧붙였다.
차박할 땐 차박 장소만 잘 선택해도 절반은 성공한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이라면 화장실과 세면장이 잘 갖춰진 오토캠핑장 시설을 이용하는 게 현명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노지 차박은 자칫 고립되거나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초보는 피하는 게 좋다. 좋은 풍경 보겠다고 해변 모래사장에 들어가거나 높은 산에 올랐다가 견인차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차박 꿈나무’들에게 차박지로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은 전망 공간 부근의 화장실이 있는 주차장이다. “무턱대고 자연이 좋다고 차에서 자면 산소 부족으로 질식할 수 있어요. 잘 땐 꼭 차의 ‘외부 공기 유입’ 버튼을 누르거나 환기가 될 만큼 창문을 열어둬야 합니다.” 차박 마니아 한익환씨의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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