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품격의 정치인' 매케인

바람아님 2018. 8. 27. 08:47

(조선일보 2018.08.27 김기철 논설위원)


1967년 10월 하노이 폭격에 나선 미 해군 조종사 존 매케인이 몰던 비행기가 미사일에 맞아 추락했다.

두 팔과 무릎이 부서진 매케인은 수용소에 갇혔다.

망가진 무릎이 축구공만큼 부어올랐지만 치료는커녕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다.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할 만큼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이듬해 그의 아버지가 미 태평양사령관에 취임하자 북베트남은

선전 차원에서 매케인을 석방하려 했다. 매케인은 "다른 포로보다 먼저 나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5년 반을 견딘 매케인은 1973년 풀려났다. 두 팔을 제대로 쓸 수 없을 만큼 장애가 남았다.

▶'전쟁 영웅, 상원의원, 대통령 후보.' 뉴욕타임스가 그제 세상을 뜬 존 매케인 부고(訃告) 기사를 내면서

이런 순서로 이력을 썼다. 매케인은 1981년 대령으로 예편한 후 정치에 뛰어들었다.

1986년 당선된 이래 30년 넘게 공화당 상원의원을 지냈다. 아버지·할아버지에 비해 빛나는 경력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은 그를 '전쟁 영웅'으로 기억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킨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매케인은 비방이 일상적인 선거전에서도 품위를 지켰다.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 민주당 후보와 맞붙었을 때였다.

한 지지자가 "오바마가 아랍 출신이라고 들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까 두렵다"고 하자 매케인은 정색했다.

"오바마는 품위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는 지지자 잘못을 지적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매케인의 가장 용기 있는 정치적 순간 5 가지'에 이 장면을 넣었다.


▶"요즘 정치에는 겸손이 부족하다. 이러다가 우리 사회는 갈가리 찢길 것이다."

석 달 전 출간한 회고록 '쉼 없는 파도'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매케인은 품격이 뭔지를 아는 정치인이었다.

당(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행동했다.

2013년 이민제도 개혁을 둘러싸고 공화·민주 상원의원들이 의기투합한 '8인의 갱(Gang of Eight)' 멤버였다.

국민 통합을 위해 당파는 뛰어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 상원 군사위원장을 지낸 매케인은 한·미 동맹을 소중히 여긴 친한파였다.

작년 3월 본지 인터뷰에서도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 보복에 맞서 미국이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선을 앞둔 한국에 대해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한·미는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고도 했다.

북핵 폐기를 향해 한·미 공조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요즘, 매케인 같은 품격 있는 정치인을 떠나보내는 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