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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 (71) '빵과 서커스'에 능했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바람아님 2019. 12. 28. 09:11

조선비즈 2019.12.27. 05:00

 

출장가방을 보면 곧 그 여행자를 알 수 있듯, 역사의 유적을 보면 그 유적을 남긴 사람을 알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방어벽(Hadrian’s Wall)은 서기 117년부터 138년까지 재위에 올랐던 로마의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영어로는 Hadrian이라 표기)의 치적을 기린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브리타니아 북부지역에 칼레도니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 경계선을 책정하고 이를 따라 방어벽 요새 건설을 명령한다. 당시 로마인들은 영국을 브리타니아라 불렀고, 칼레도니아란 지금의 스코틀랜드를 말한다. 이 방어벽은 거대한 로마제국의 북쪽 끝이었던 것이다.

푸른 초원 사이로 양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호수 지역 사이에 우뚝 서있는 장벽의 광경을 바라보면 만리장성이 떠오른다. 진시황을 비롯한 역대 한족 왕조들이 유목민과 이민족의 침략을 경계하여 북쪽에 만리장성을 건설한 것과 같은 이치다.

로마제국은 유럽대륙에서도 게르만족과의 경계였던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 주변의 국경을 따라 리메스(limes)라는 이름의 요새를 건설한다.

로마시대 황제들 가운데 하드리아누스처럼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양자가 되어 제국을 통치하게 되는데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 본토가 아닌 스페인 출신이고 친척이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서든 극단적으로 달랐다.

전임 트라야누스 황제는 현재의 루마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침략해 로마제국 역사상 최대로 영토를 확장했던 팽창주의자였다.

반면 후임자 하드리아누스는 즉위하자 마자 분쟁지역에서 과감히 철수하고 대신 제국의 통합을 공고히 하겠다고 ‘평화정책’을 선언한다. 안정적인 방어전략을 택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21년의 긴 재위기간 동안 정력적으로 제국 영토를 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재임 중 그보다 많은 곳을 여행한 황제는 없었다.

121년 갈리아 지방과 국경을 이루고 있던 도나우의 노리쿰, 상(上) 게르마니아 등 지금의 독일 남부지역을 방문했고, 122년은 갈리아, 스페인, 하(下)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로 갔는데, 바로 이때 브리타니아에서 저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방어벽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다음해에는 리비아와 아프리카 마우레타니 속주를 지나 크레타, 소아시아, 폰토스, 비티니아, 유프라테스 국경까지 간다. 125년에는 그리스를 방문해 이곳의 아테네에 푹 빠졌고, 북쪽 도시들을 둘러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대,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나일 등 사막지역을 두루 순시한다. 터키 안탈리아에 하드리아누스의 문,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 등 제국 곳곳에 그를 기리는 유적이 많이 남아있던 이유다.

이전의 황제들은 모두 수염을 깎았지만 그는 그리스 식으로 턱수염을 기른 최초의 로마 황제로 기록된다. 하드리아누스는 키가 크고 체격도 좋았으며 곱슬머리였다.

역대 로마황제들 가운데 지적 능력이 뛰어난 3명의 황제 가운데 한 명(나머지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답게 국가예산을 상세하게 꿰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번영이 중동과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오는 농산물에 달려있다고 판단해 농촌지역에 활력을 불러 넣은 것은 국가경영자로서 뛰어난 지적 통찰력을 말해준다.

현대인들이 말하는 ‘멀티태스커’(multitasker)였으며, 시와 문학뿐 아니라 건축, 어원학, 군사학, 음악, 스포츠 등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조예가 있었다. 초기 기독교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황제를 가리켜 ‘온 세상 진기한 것의 탐구자’라 불렀을 정도다.

그는 관료기구와 통치기구 정비와 함께 사르비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명하여 ‘영구고시록(永久告示錄)이라 불리는 법전을 편찬하게 하는데,

이 법은 오랫동안 서로마제국 통치의 근간이 되었고, 훗날 동로마 제국 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즉 로마법 대전이 편찬되는데 중요한 토대를 이뤘다. 군대의 규율도 혁신하여 군인복장으로 전선에 있는 군인들과 음식을 함께 즐겨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행사가 끝난 뒤에는 따로 황제만의 특별한 식사를 즐겼으며, 겉으로는 서민적이고 솔직하며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프루멘타리’라는 비밀 스파이조직을 구축하여 경쟁자나 불만이 있는 자들을 색출하게 하여 고문 살인하는 등 매우 음흉한 인물이었다는 대조적인 평가도 있다.

토론에서 지는 것을 질색해, 사소한 것이라도 모욕을 당하면 훗날 반드시 복수를 했다고 한다. 영국의 유명한 전기작가 프랭크 매클린은 그런 하드리아누스의 면모를 가리켜 이렇게 분석했다.

"박식하며 거만하고 우쭐대며 생색내기 좋아하는 하드리아누스의 이 ‘우월 콤플렉스’는 남을 곤란하거나 짜증나게 만드는 것에 불과했지만, 최고가 되려는 이런 욕심은 또한 살해본능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변덕스럽고 화를 잘 내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는데 한번은 격분하여 펜으로 노예의 한쪽 눈을 찔러 실명하게 만들었으며 긴장관계였던 원로원들이나 심지어 후계자로 임명했던 사람들까지 가차없이 살해하여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천성적인 그의 폭력취향과 살해본능이 잘 나타난 것이 스스로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로서 경기에 나선 것과 투창으로 사자사냥에 집착한 것이다. 그는 시민들 앞에서 어느 날 사자 100마리를 죽였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기행의 소유자였으며 대중 쇼를 즐겼다.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가 풍자한 것처럼 그는 ‘빵과 서커스’에 능했던 정치인이었다.

[미니정보] ‘빵과 서커스’ 그리고 검투사

그는 로마와 제국에 많은 건물과 유적을 남겼는데, 로마의 전통 신들을 모시는 판테온을 현재의 자리에 개축하였으며, 정치와 경제 생활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를 증축하고 로마 외곽인 티볼리에 거대한 황제 별장 단지인 ‘빌라 아드리아노’을 세운 것도 바로 그였다.

결혼은 했지만 많은 미소년들과 관계를 맺은 동성애자였으며, 특히 나이 들어 만난 안티노우스에 푹 빠져 지냈다. 하지만 그가 이집트 나일강에서 익사한 후 실의에 빠져 안티노우스를 신격화하며 동상까지 세우기까지 했다.

인생 후반부 육체나 정신 모두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으며 이에 앞서 자신의 죽은 뒤 영생의 능과 묘 자리인 산탄젤로 성을 건설해두었다.

그의 임기 동안 시몬 바르 코크바의 지도아래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평화기’라 말하지만 훗날 로마의 많은 저술가들은 그의 평화정책을 비겁한 것이며 많은 문제를 잉태시켜 결국 로마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한다.

안정과 실리경영을 주장 이면에는 방만한 해외 순시와 막대한 건축비용으로 제국의 재정이 파탄 나는데 한몫을 했다는 비판의 소리도 많다.

138년 7월 10일 그는 6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로마황제열전’에서는 그가 ‘모든 사람들의 증오 속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많은 업적을 남긴 5현제(賢帝)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순행을 기리는 비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빵과 서커스 정치의 한계였다.


*‘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은 이 글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손관승·언론사 CEO출신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