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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중동천일야화] 여유와 포용의 제국 페르시아의 귀환

바람아님 2016. 4. 27. 09:00

(출처-조선일보 2016.04.27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제국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 핵 타결 후 거대한 변화 조짐
한때 '세상의 절반'이라 불린 수도 이스파한을 가졌던
제국의 여유와 포용력으로 새 시대 열어갈 수 있을까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페르시아'라는 이름의 거인이 결박을 풀고 있다. 
오랜 제재를 받아 온 이란이 핵 협상 타결 이후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설 모양새다. 
고대와 중세를 아우르며 시대를 풍미했던 제국의 후예들이 보이는 몸놀림은 예사롭지 않다. 
이웃 나라들은 아연 긴장하고, 국제사회는 기대와 우려가 함께 담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

부침(浮沈)은 있었지만 제국 페르시아는 늘 강인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를 이끌었던 사이러스(키루스 또는 고레스라고도 함) 대제(大帝)의 
신화는 제국 역사의 절정이다.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그는 흉포한 바빌론 제국이 정복했던 소수민족들을 해방시킨다. 
"누구도 다른 민족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민족은 평등하며 지배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그의 선언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연상케 한다. 
이 선언은 점토 기둥에 쐐기 문자로 새겨져 수천 년이 흐른 지금 대영박물관에 남아있다. 
포로로 끌려와 강가에 앉아 예루살렘을 향해 울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고향을 되찾게 해준 이가 바로 사이러스 대제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이 함께 그를 숭앙하는 이유다.

중세 페르시아의 상징은 압바스 대왕이다. 사파비 왕조를 이끌며 고대 페르시아의 영화(榮華)를 되살려냈다. 
그는 정복한 영토 위에 자기만의 왕국을 구축하지 않았다. 
생소한 문화와 문물을 동서로부터 끊임없이 받아들여 중앙아시아와 지중해를 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이라 불리며 문명 교류의 정점을 구가했다. 
페르시아의 문화와 사상을 흠모하는 조류, 즉 '페르소필리아(Persophilia)'도 이때 연유했다. 
제국의 힘은 무력과 배타성에 있지 않다. 
세계를 함께 아우르며 공존하게 할 수 있는 여유와 포용에 진정한 제국의 힘이 있다.

하지만 천하의 제국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근·현대에 접어들고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에 굴복했다. 
카자르 및 팔레비 왕조는 유약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은 결정타였다. 
교조적 종교 이념이 권력을 송두리째 장악하면서 이란은 폐쇄적이고 음습한 신정(神政) 국가로 변신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수민족을 끌어안으며 분리된 세계를 연결했던 페르시아는 없었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퇴행적이었다. 핵 개발 문제가 맞물리면서 의혹과 불신의 이미지까지 덧대어졌다.

그러나 속살 한구석, 페르시아의 자취는 옅게 남아 있었다. 
성직자 통치의 혹독함 속에서도 이란 국민은 마냥 굴복하지는 않았다. 선거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투표를 통해 자신들 손으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결기를 지켜왔다. 
그뿐이랴. 여전히 시와 노래를 사랑하고, 여성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세련된 자신의 멋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신의 다스림으로도 인간의 세계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셈이다.

그 이란에 지금 새로운 변화의 전조가 나타나고 있다. 계기는 역시 선거였다. 
2013년 대선을 통해 핵 협상 타결에 이르렀다. 
그리고 금년 2월 총선에서 이란 국민은 정치권을 향해 고립을 깨고 국제사회와 더 깊이 함께해줄 것을 요구했다. 
어쩌면 그들은 사이러스와 압바스의 페르시아를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땅을 차지하는 제국, 특정 이념에 복속되는 제국이 아니라 나라를 열어 갈라진 세상을 잇고, 소수민족과 종파를 존중해주는 
페르시아의 전통을 되살릴 수 있을까? 
여전히 미사일 실험과 인권침해를 일삼는 일부 보수 기득권 성직자의 완고한 배타주의를 이겨낼 
이 시대의 사이러스와 압바스를 보고 싶다. 오늘의 희망이 단순한 미망(迷妄)에 그치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