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김대중 칼럼] 국민 수준이 정치 수준을 앞서기 시작했다

바람아님 2016. 4. 12. 06:43

(출처-조선일보 2016.04.12 김대중 고문)

과거 정치인은 당당하고 孤高
표 급해도 선비답게 절제, 국민 이끌고가는 언행 보여줘
현 정치권은 수준 이하 행태… 이제는 국민이 정치 주역으로
내일 투표가 정치 수준 보여줄 것

김대중 고문 사진"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이라고 했다. 
정치의 질(質)은 국민 의식 수준을 반영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4·13 총선의 경우, 이 말은 틀린 것 같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정치의 그것을 앞서가고 있고, 정치는 저질을 못 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정책은 실종됐다.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삶은 정치권의 관심 밖이었다. 
북한의 핵 개발 영역이 날로 확대되고 있고, 세계가 대북 제재에 열을 올리는데도 4·13 총선에서 
그런 문제는 거론조차 없었다.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한국의 안보무임승차론이 제기돼도 
정치 싸움에 몰두한 우리 정치권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다. 
청년 실업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경제는 장기 불황의 터널에 진입하고 있는데도 이 문제를 다루는 논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역 대표(국회의원)를 뽑는 선거인 만큼 국지적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는 것이 불가피하다 해도 적어도 중앙당 차원에서 
국가적 의제로 다루어야 하는 과제의 기본과 프레임은 제시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 이 시점에 우리나라가 처한 국제적, 안보적, 경제적 환경과 대북·통일 과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선거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한 나라의 정치 담임자들이 해야 하는 의무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논의는 아예 없었다. 관심마저 없어 보였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정파적 이전투구였고 3류 쇼들이었다. 
'친박' '친노' '패권' '단일화'들이 판을 쳤고, 일반 국민은 이런 놀음에 지겨울 대로 지겨워졌다. 
정치인들은 여야 간에 걸핏하면 무릎 꿇고 사죄하는 정치 쇼를 연출했다. 
불과 며칠 전에 자기들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정치 쇼에 대해 무릎 꿇고 사죄할 양이면 
저들이 지금 한 행동이 내일 또 사죄거리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아무 데서나 무엇에나 무조건 '사죄'면 장땡인 줄 안다.
 거기에 꼴불견 춤추기, 노래하기, 모자 쓰기 등이 무슨 이벤트 놀이처럼 이어졌다. 진정성도 없고 비굴해 보이기만 했다. 
선거가 코앞이라 대통령이라 해도 혹시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보를 조심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지금 선거판에는 이런 절제들이 보이지 않았다.

과거 3공·5공 시절 비록 정치는 일방적이고 독재적이었어도 정치인들 특히 야당 정치인들은 당당하고 고고(孤高)했다. 
그들은 아무리 다급해도 무릎 꿇는 법이 없고 아무리 '표'가 급해도 쉽게 사죄한 적이 없었다. 
그때 정치인들에게는 지킬 것은 지키는 선비다운 절도가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국민을 이끌고 갔다. 
국민의 의식 수준을 앞서 갔다. 국민에게 정치를 보여줬다. 
국민은 그들의 언행에서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리고 독재와 탄압을 이기는 길을 찾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정치가 국민을 이끌고 가기는커녕 정치가 국민 수준을 반영하는 정도도 못 된다. 
이번 4·13 총선을 계기로 정치 수준이 국민의 수준 아래로 처지는, 다시 말해 선도자(先導者)의 위치가 역전(逆轉)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어제 정치놀음에 장기 말처럼 이용됐던 국민은 이제 정치인의 '노는 꼴'을 역겨워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고, 친박의 텃밭이라는 대구의 민심이 이반하고 있다고 들린다. 
야당의 본거지였던 광주와 호남은 말을 갈아타고 있다. 
한때 '철수'하는 당(�)이라는 오명(?)의 국민의당이 오히려 약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유권자의 정치의식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은 '하라는 대로 하는' '찍으라는 대로 찍는' 도구가 아니라 정치권을 비판하고 호통치고 매를 드는 정치 주역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독자는 이제 투표지에 '지지자 없음' 난도 만들라고 요구한다. 
텔레비전에는 후보자가 내민 손을 외면하는 유권자의 모습도 보인다. 
자신들이 어느 정파의 '집토끼'로 치부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야권 분열'이 '집권당 도와주기'라는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늙었다고 누구 찍고, 젊었다고 누구 찍는 고정관념도 거부하고 있다.

정치권의 후진은 오늘날 나라를 이끌고 갈 금도(襟度) 있는 지도자의 부재(不在)에 기인하는 것이다. 
정치의 책임과 본분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리더  십이 없다. 
근자의 여론조사에서 제시되는 대통령 지망자들의 인기 순위는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상대적 표현일 뿐이지 
적임의 순위가 아니다. 내일의 투표로 구성될 20대 국회가 파벌 정치의 아귀다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집합소일지,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경제를 살피는 향도로 기능할 수 있을지는 국민 눈높이에 정치 수준이 얼마나 따라올 것인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