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사설] 중간평가에서 참패한 여권 … 국민 이기는 권력 없다

바람아님 2016. 4. 15. 00:28
[중앙일보] 입력 2016.04.14 01:34

4·13 민심은 사나웠다. 오만한 사육사를 물어버리는 맹수와 같았다. 분노의 투표는 놀라울 정도였다.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결과는 박근혜 대통령의 새누리당 정권에 대한 선거혁명 수준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집권세력은 16년 만의 충격적인 여소야대 태풍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더불어민주당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지지를 받았지만 기반인 호남을 잃었다. 김종인 대표의 더민주에 대한 경고이며 제3당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한 안철수·천정배 대표의 국민의당에 대한 승인이었다. 심상정 대표의 정의당엔 국회에서 최소한의 활동영역을 제공했다.

13일 자정까지 방송 개표에 따르면 새누리당은 과반 에 훨씬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이번 선거는 과거에 좀처럼 볼 수 없었던 1여2야 구도에서 치러졌다. 정당 구도상 절대적으로 유리한 집권당의 압승이 예상됐다. 새누리당은 지난 공천 파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국회 재석의 3분의 2인 180석까지 내다봤었다. 총선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122석의 수도권에서 두 야당의 분열에 따른 어부지리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박근혜 정권 심판이라는 확실한 의사 표시를 했다. 정권의 실정을 심판하려는 성난 민심의 흐름은 야당분열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거셌다. 이런 거대한 민심의 움직임은 새누리당 안전지대로 여겼던 충청·강원 등 이른바 중원에까지 뻗어갔다. 이 때문에 선거 전날까지만 해도 새누리당 160석 이상, 더민주 100석 이하로 전망한 많은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새누리당의 참패는 여야 양당대결 구도로 힘겹게 치러졌던 4년 전 19대 총선에서도 과반인 152석을 얻은 것과 비교하면 명백해진다.

박근혜 정권의 참패는 민심이 분노하면 선거 구도를 삼켜버릴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 대통령은 국민 이기는 권력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유권자의 분노는 직접적으로는 오만하고 졸렬한 막장극이었던 지난 2~3월의 새누리당 공천 파동에서 비롯됐다. 이른바 친박 핵심세력은 박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배신자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멀쩡한 유승민 의원 등에게 어설픈 표적 칼날을 휘둘렀다. 그들은 힘과 권력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해치울 수 있다는 패권주의적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박의 살생부 논란과 보복공천 의심은 상당 부분 현실로 드러났고 여기에 맞서 김무성 대표는 블랙 코미디 같은 ‘옥새 파동’을 일으킴으로써 집권세력은 전 국민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새누리당 지도부가 아무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도 한 번 등 돌린 민심은 돌아서지 않은 것이다.

이번 선거는 박근혜 대통령의 5년 임기 중 3년간 통치에 대한 중간평가다. 임기 반환점을 돌았음에도 저성장·저출산·불평등 같은 국가적 과제의 본질엔 손도 대지 못하고 구조개혁에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실정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다. 결과적으로 더민주의 김종인 대표가 ‘문제는 경제, 정답은 투표’라는 선거 슬로건을 들고 나온 건 국민의 불안하고 허전한 마음을 정확히 파고든 구호였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입만 열면 국회 심판, 일 안 하는 야당 심판을 외쳤지만 국민은 거꾸로 국정의 무한책임을 진 집권세력을 향해 반성과 쇄신을 요구한 것이다.

지난 3년간 박 대통령은 인사난맥과 불통으로 무수한 비판을 받아왔다. 대선 때 약속했던 지역탕평 인사는 아예 사라진 지 오래다. 청와대 참모나 정부 부처 장관들조차 대통령과 대면 보고가 어려울 정도로 소통 장애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를 뒷받침하고 보완하는 집권당 대표와 원내대표를 무슨 부하 직원처럼 여기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게 문제로 지적돼 왔다. 입법권을 쥐고 있는 국회를 설득하고 협조를 구하기보다 윽박지르고 압박하는 자세는 앞으로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임기 후반기에 있을지 모를 레임덕을 예방하기 위해 박 대통령은 집권당, 야당 등과 더 긴밀한 대화와 소통에 힘써야 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수도권의 대약진으로 새누리당과 대등할 정도의 의석을 얻었다. 그러나 더민주는 지난 4년간 국회 선진화법에 의지해 반대를 위한 반대, 국정의 발목을 잡는 역대 최악의 19대 국회의 주인공이었다. 이른바 친노 운동권 세력과 패권주의 문화가 더민주를 지배했기 때문인데 4·13 총선은 이 극단주의적인 정치문화의 청산을 제1야당에 요구했다. 급기야 호남민심은 친노 패권세력과 흑백 진영논리의 저수지로 여겨지는 더민주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철회하고 안철수의 제3당을 밀어주었다. 광주의 8석 전부와 전남·북 20석의 과반수를 국민의당에 넘겨줬으니 “호남이 지지를 거둬들이면 정계를 은퇴하고 대선에 불출마하겠다”고 한 문재인 전 대표의 처지가 딱하게 됐다. 문 전 대표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고향인 대구에서도 김부겸(더민주)·유승민·주호영·홍의락(이상 무소속) 의원이 당선됐고 울산, 경남·북에서도 다수의 야당, 무소속 당선자가 출현해 영남은 이제 더 이상 새누리의 텃밭이 아니게 됐다. 영호남 양쪽 지역 모두에서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정치는 3류여도 유권자는 1류라는 믿음이 차오른다.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수권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더민주의 강력한 야권연대 요구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제3당 체제를 성립시켰다. 어엿한 국회 교섭단체가 되었으니 20대 국회에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대안으로 제1, 제2당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의 정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당은 호남 의석은 휩쓸다시피 했지만 수도권 당선자가 안철수 의원 등 극소수에 불과한 만큼 20년 전 자민련처럼 지역주의 중소정당의 운명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호남도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의 친노 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수단으로서 국민의당을 지지했을 뿐 안철수 대표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표명한 건 아직 아니라고 봐야 한다. 두 야당은 앞으로 서로 경쟁과 견제를 통해 수권능력을 가다듬고 키워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