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27] 비야 셀민스, '난로'

바람아님 2013. 8. 12. 07:57

(출처-조선일보 2011.08.30 우정아 KAIST 교수·서양미술사)


스산한 마음에 다정한 위로가 필요하다면 덕수궁 미술관 뉴욕 휘트니미술관 소장품전에 나온 미국 화가 비야 셀민스(Vija Celmins· 1939~)의 '난로(Heater)'〈사진〉를 추천한다. 캔버스 한가운데에 회색 전기 난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썰렁한 작품이지만, 그림을 둘러싼 공기만큼은 오렌지빛으로 환하게 달아오른 열선의 열기로 훈훈하게 느껴질 것이다.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셀민스는 일곱 살 때 2차 대전 이후의 혼란을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영어를 익히기까지 두어 해 동안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던 교실에서 셀민스가 선택한 일은 주위에 놓여 있는 사물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었다. 그녀에겐 결국 소박한 물건과 말없이 주고받았던 수많은 시선이 사람과의 친밀한 대화를 대신해 준 셈이다.

미술대학을 나와 화가가 된 후에도 셀민스는 난로와 지우개, 스탠드와 전기 냄비 등 작업실 한쪽에 놓여 있는 생활의 집기들을 성실하게 캔버스에 옮겼다. 그녀는 미리 대상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바탕으로 드로잉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의 난로는 카메라로 찍은 듯이 지극히 사실적이지만, 난로를 제외한 배경은 어디가 바닥이고 벽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평면적이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난로는 '한때 셀민스라는 화가가 갖고 있던 물건'이 아니라 보는 이들 각자의 서로 다른 기억 속에서 따스하고 나른한 온기를 발산하던 '그때 그 난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