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손길 없어도, 아니 그 손길 없어서 피는 꽃. 야생화. 야생(野生)이라 하니 왠지 동물 같다. 차라리 들꽃, 산꽃이라 할까. 서쪽 바다 작은 섬 선착장에 내리니 '야생화 보물섬'이라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사진 애호가들이 벽돌 같은 검은색 카메라 들고 들꽃 찍으러 몰려든다. 배는 하루 딱 한 번. 일단 내리면 하룻밤 보내야 한다.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 1시간 30분. 경기도 안산에 딸린 섬이다. 직선거리로는 아산만에 더 가깝다. 섬 이름은 풍도.
"야생화가 쉽게 보일 리 없지…." 아니었다. 제법 군락을 이뤄 꽃을 피웠다. 최소 다섯 종(種)은 볼 수 있다. 쉽게 찾을 수 있는 꽃밭이 두 곳 있다. 선착장 왼쪽 길 끄트머리에 있는 발전소(한국전력) 건물에서 시멘트 도로를 오른다. 군부대 지나 정상 능선에 서면 왼쪽에 군 시설이 있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 아래로 내려가는 길과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먼저 내려가는 길로 간다.
노란빛 꽃이 금세 여기저기 보였다. 복수초. 지름 3~5㎝는 될 정도로 크다. 풍도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꽃이다. 무릎을 꿇거나 아예 누워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 사람 10여명이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싱싱한 노루귀가 있어요." 노루귀 꽃잎은 흰색에 가까운 분홍빛이거나 붉은색에 가까운 진홍빛이다. 꽃대에 솜털이 수줍게 달려 있다. 지름 1㎝ 정도. 10여개 무리지은 줄기가 일제히 꽃을 내밀고 있다.
이건 잎인가, 꽃인가. 푸른색 또는 붉은색 빛을 내는 '풍도대극'이다. 잎 속에 작은 꽃이 들어선 모양이다. 지름 4~5㎝. 이 군락지에서 발견한 들꽃은 이렇게 셋이었다.
예서 그칠 수 없다. 풍도바람꽃을 찾아야 한다. 6년 전 변산바람꽃과 다른 종이라는 확정 판정을 받았다. 풍도에서만 볼 수 있다. 정상 능선에서 오른쪽 산길로 간다. 10여분 걸으면 능선 아래에 최대 군락지가 있다. 굵은 밧줄로 군락지를 둘러쳤다. 얼른 보이는 꽃은 역시 복수초. 더 자세히 보니 흰 꽃잎에 노란 연둣빛 꽃술로 치장한 풍도바람꽃이 나무뿌리 옆 곳곳에 모여 피어 있다. 지름 3㎝쯤. 풍도바람꽃은 여기서만 보았다. 이곳에서 찾은 꽃은 둘 더 있다. 보라빛 꽃무리가 달려 있는 현호색, 앙증맞은 흰빛 꿩의바람꽃. 둘은 아주 자세히 보아야 찾을 수 있다. 꽃 찾는 재미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군락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수령 500년 은행나무가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돌아가다 심었다는 전설과 조선 인조 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파천하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설명문에 적었다. 사실이 아닐 것이다. 소정방이 심었다면 수령 1500년은 되었을 터. 인조가 이 외딴 섬에 들렀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실록에 따르면 인조는 1624년(인조 2년) 음력 2월 8일 도성을 떠나 이튿날 수원에 이르렀고, 11일 천안에 도착했다. 공주로 향한 때는 13일이었다. 난 진압 후 18일 공주를 떠나 도성에 돌아온 때는 22일. 실록은 임금이 거쳐 간 여정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에 배를 타고 풍도로 건너갔다는 기록은 없다.
은행나무가 지켜본 역사는 따로 있다. 청일전쟁이다. 1894년 7월 25일 일본 해군은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 함정을 기습했다. 청은 아산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에 증원군 2300명을 보내려고 했다. 풍도해전에서 청 함선 제원호는 달아났지만, 청군 1100명이 승선한 고승호는 일본군의 함포 사격에 격침됐다. 이 해전으로 승부는 사실상 판가름났다. 오타니 다다시 일본 센슈대 교수는 "풍도해전의 결과, 아산에 증파 예정이던 청군 병력 절반 정도가 저지되어 이후 성환·아산 전투에서 일본군 승리로 이어졌다"('일청전쟁')고 했다. 지금 저 바다 아래에는 전함의 자취와 죽은 이의 넋이 떠돌고 있을 것이다.
풍도 바다에서 청일전쟁이 있었다는 설명은 섬마을 두 곳에서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선착장 입구에 있는 '풍도 소망탑' 표지판. 탑은 보이지 않는다. 색깔 칠한 돌무더기가 옆에 있다. 아마도 쌓았던 탑이 무너진 듯하다. 또 하나는 풍도등대 설명문. 선착장에서 오른쪽 산책로를 따라간다. '청일전쟁 근원지로 싸움이 치열했던 곳'이란 설명이 있다.
민박집에서 자고 일어난 이튿날 아침. 육지로 가는 배는 낮 12시30분에 들어온다. 시간이 남는다. 선착장 오른쪽 길로 해안선 따라 산책했다. 풍도등대 지나 채석장을 지나 산길로 오른다. 돌로 이어진 바위섬에 노란 등대가 보인다. 산책은 여기까지. 절벽이 이어져 해안을 따라 갈 수 없다. 이제는 후망산(175m) 등산이 기다린다. 아침 산책에서 보라색 꽃 하나를 더 찾았다. 스마트폰으로 찍어 꽃 이름 알려주는 앱에 물어본다. '제비꽃'이라고 했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오전 9시 30분 하루 한 번 출발.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을 거쳐 풍도로 간다. 인천에서 2시간 30분 걸린다. 홀수 날에는 인근 육도를 먼저 들러 30분 더 걸린다. 대부해운 인천지점(032-887-6669), 방아머리선착장(032-886-7813). 인터넷 예매는 ‘가보고 싶은 섬’(island.haewoon.co.kr). 주말에는 예매표가 거의 남지 않지만 현장 판매분이 있다. 전화로 먼저 문의한다.
숙박은 민박. 풍도랜드(032-831-0596), 바위펜션(032-834-1330), 풍어민박(032-831-3727) 등. 숙박 5만원. 야생화 보호 및 청소비 명목으로 입도비 5000원(1인)을 따로 받는다. 이를 못 내겠다는 손님과 다툼이 일기도 한다. 식당이 마땅치 않다. 민박집에 미리 주문해야 한다. 한 끼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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